'자본주의 사회에서 네가 진정한 위너다'라는 비아냥 섞인 말을 들으며 대기업을 나올 때만 해도, 나는 자신이 있었다. 뭘 하든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 이렇게 불행하게 회사를 다니며 나를 갉아먹는 것보다야 조금 더 가난하고 행복하길 택하겠어. 그런 생각으로 나는 2년의 짧은 회사 생활을 마치고 백수가 되었다.
대학 시절 과대도 하고 두루두루 친구들과 잘 어울린 덕분에 조직생활에 잘 적응할 것 같았던 나는 알고 보니 전혀 조직생활 체질이 아니었다.'그런 카디건을 입으면 노티 나는 거 알아?', '그런 스타킹 색깔은 정말 별론데' 하는 무례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사람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닮고 싶은 사람은 1도 없는 사무실, 매주 월요일부터 회식을 잡아대는 유부남 과장님들, 비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업무... 나는 자연스럽게 도망갈 구멍을 찾았고, 통번대를 탈출구 삼았다.
현재 남편이자 당시 남자친구가 외국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도 새 목표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 세계 어디든 나가서 일할 수 있는 일로 번역은 꽤 괜찮은 일 같았고, 글을 쓰고 만지는 걸 좋아했던 학창 시절 기억도 겹쳐지면서 나는 자연스레 번역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전문 번역가로 일한지 이제 12년이 되었다.
지난 12년 동안, 여러 권의 책과 각종 커머셜 문서를 번역하며 이 가정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모두 아는 것처럼 번역은 큰 돈을 손에 쥘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내게 주어진 글자들을 성실하게 번역하면 남들 회사 다니는 것만큼의 월급을 손에 쥘 수 있다는 것, 외국 나와 살며 집에서 노는 대신 집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 아이들 키우며 다른 사람 손 빌리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것, 이제껏 나는 이에 감사하며 일해왔다.
작년에는 코로나의 여파를 느낄 새도 없이 바빴다. 일감은 꾸준했고, 아이들을 재운 뒤 늦은 밤까지 일하는 날들이 수도 없었다. 간혹 1~2주 일감이 없어 널럴한 날들이 이어지면 불안하기도 했지만, 곧 일 폭탄이 몰아쳐 '나 아직 죽지 않았어!' 하는 즐겁고도 고단한 비명을 지르게 해주었다. 커머셜 번역에 더해 말글로 비교적 쉽게 풀리는 웹소설 번역을 6개월 정도 맡아 한 것도, 수입 측면도 그렇고 정서적으로도 안정감을 주었고. (웹소설 요율은 짜디 짜지만, 말글이라 번역 속도가 붙으면 은근 괜찮은 수입원이 된다. 다만 하루 1만자씩 꾸준히 아웃풋을 내야하니, 다른 번역일보다도 무거운 엉덩이가 요구된다.)
그런데 한바탕 일의 폭풍이 몰아치고 지나간 요즘, 무려 한 달 넘게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일이 뜸했던 적이 있었나? 처음인 것 같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일이 뜸한 비수기에는 CV를 다시 업데이트해, 회사들에 쭉 돌렸던 것도 같은데...이짓을 12년째 하려니 것도 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작년 한 해, 엄청 오른 주식과 부동산을 보고 있으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고. 번역...그렇게 열심히 해서 뭐하나, 차라리 그 시간에 경제공부를 하는 게 낫겠다 싶은 거다.
생각해보면 지금에서야 코로나의 여파가 내게 미치는 게 아닌가 싶다.
높은 요율로 짭짤한 수익을 안겨주었던 미술관과 박물관 번역이 뚝 끊긴지 몇 달째, 도쿄올림픽 관련 번역도 대회의 축소 개최 때문인지 많이 줄었다. 관광 번역은 말할 것도 없고...
게다가 작년에 웹소설을 번역하며, 남의 글을 옮기는 번역이라는 내 일에 근본적인 회의감을 갖게 됐다.
아, 이런 글을 쓰는 작가도 한국에 판권을 팔아 저작권료를 받는데, 나는 이런 글을 번역하고 고작 한 자에 xx원 하는 번역료를 받는구나.이렇게 그지같은 글도 팔리는 시장이면 차라리 나도 한 편 쓰는 게 낫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몇몇 웹소설 수작을 읽고 과연 내가 제대로 된 작품을 완결낼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에 빠진 상태지만. 게다가 웹소설로 제대로 돈 버는 작가가 상위 2~3%에 불과하다고 하니, 그냥 한 자에 xx원 벌어 월급쟁이 만큼 버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프리랜서의 숙명은 일 없는 오늘을 걱정하고, 아무 것도 기약되지 않은 내일에 불안해하는 것일 테다. 그 대가를 치르고 손에 쥔 자유가, 오늘 같이 일 없는 날에는 무겁게만 느껴진다.
일이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나 이제 번역가로 수명이 다 되었나보다' 하는 불안이 스물스물 기어오른다. 동시에,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웹소설 시장을 보고 있으면 지금이라도 번역 일을 줄이고 부가가치가 더 높은 일을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이 든다.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더 낮은 요율의 일을 받아 정신없이 바쁘게 하루라는 쳇바퀴를 굴리고, 과로로 얼마 남지도 않은 창의력도 박살내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텐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생각만 많고, 실천은 쉽지가 않다. 내가 가진 것을 떨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에, 번역가의 엉덩이는 오늘도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