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 아트]

내 앙뜨로와 흰색 아니라니까!

by Curtain call
아트.jpeg 아! 아! 아!! 아!!!!! 아!!! 아!!!


[극 내용을 필터링 없이 감상평에 사용하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엄기준 배우가 보고 싶어서 예매했다가, 공연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회전문에 들어갔습니다. 본격적으로 회전문을 도는 극은 이번이 두 번째, 7년 만의 일입니다. 공연이 재미있어서 한 두 번 더 보는 경우는 흔한 일이지만, 덕통사고를 당하면 느낌부터가 다른 것 같습니다. 헛웃음이 나고 어이가 없고…’ 망했다’ 싶은 기분이 딱 들어요. 2월 25일 저녁 공연으로 아트를 첫 관람한 순간이 그랬습니다. 보면서 망했다~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공연이 끝나고 나오자마자 2회 차 티켓을 예매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그런 순간이 정말 오랜만이라 무척 즐거웠습니다. 옛날에 처음으로 회전문을 돌던 때는 대학생이었는데, 그때는 돈이 많이 없다 보니 매일매일 공연을 보러 오는 직장인 관객들이 부러웠던 기억이 있어요. 어느덧 7년이 지나 직장인 관객이 된 지금은…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체력도 없는 삼진아웃 그 자체… 지금도 평일 밤공 보고 귀가하면 바로 기절해 버리는 수준입니다. 그래도 힘을 내서 열심히 봐야죠. 지나간 공연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후기를 작성하는 날 기준, 아트를 총 2회 차까지 관람한 상태입니다. 볼수록 매력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공연이더라고요. 우선 배역의 나이대가 정해져 있지 않고, 세르주, 마크, 이반이 친구라는 관계 설정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20대(사실 이십 대 초반은 될 수 없긴 합니다 그들이 25년 지기 친구들이기 때문에…)부터 90대까지 다양한 나이대로 존재할 수 있어요. 20대는 사실 좀 과장된 거고, 극 중 설정과 맞으려면 최소 30대 부터긴 하지만요. 엄기준 배우가 20대 때 아트를 실제로 관람하고, 나중에 40대가 되면 아트를 꼭 해야지라고 마음먹었다고 하던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네요. 그리고 아마 60대가 되어도 여전히 세르주로서 무대 위에 설 수 있을 거예요. 실제로 이전 시즌엔 이순재 선생님께서 비슷한 연배의 다른 대배우 분들과 아트를 공연하신 것 같더라고요. 배우들에겐 지금의 내가 몇십 년 뒤에도 같은 배역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얼마나 즐거울까요.


아트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시도 때도 없이 웃긴 공연이라서 관객들 모두 다 관극 매너 같은걸 신경 쓰기보단 그냥 와하하 웃어버릴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요즘 공연계의 시체관극 문화가 많이 화자 되는 와중에 그냥 시원하게 웃으면서 볼 수 있는 공연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저도 첫 시작 3분 뒤부터 그냥 저항 없이 웃음이 터져버린 것 같습니다. 돈이 많긴 하지만 또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건 아닌 허세주의자 세르주가 5억이나 주고 산 하얀.. 판때기가 영 못 마땅한 공포의 주둥아리를 가진 마크, 그리고 두 친구가 그냥 좀 서로에게 지나치게 참견하지 말았으면 싶은 결혼식이 코 앞인 이반까지. 공통점이 도대체 뭔가 싶은 수준으로 서로 다른 세 사람의 우당탕탕 100분간의 지랄 발광. 진짜 재밌어요, 그리고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도 하게 만듭니다.


공연을 더 보면서 개인적인 해석이 바뀔 수도 있지만, 일단 지금의 제 감상은 이러합니다. 20년 넘게 친한 친구 사이를 유지하더라도, 타인과의 관계에는 어느 정도의 멸시와 열등감, 허세가 깔리기 마련이라고요. 이건 사람의 본성인 것 같습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겠다마는… 일단 우리 세 주인공 중 두 명은 확실히 서로를 마냥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에요. 시기 질투, 그리고 무시와 멸시를 그간은 어떻게 잘 숨겨왔겠으나, 20여 년 간 유지된 이 관계가 세르주의 5억짜리 하얀 판때기(ㅋㅋ) 때문에 수면 위로 올라오고 맙니다. 자기중심적이고 남을 배려해서 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마크는 세르주의 소비의 값어치를 이해하지 못함을 거침없이 쏟아냈고, 허영심 가득하고 예민한 세르주 또한 마크의 그런 도발을 그냥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둘의 신경전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늘 둘 사이에서 애매한 줄타기를 하며 상황을 웃어넘기는 이반 또한 이번 사태에서 완벽하게 논외의 입장으로 남지는 못합니다. 시작은 하얀 판때기에 대한 논쟁이었으나, 결국 끝은 친구 사이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마무리되어버리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사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타인과 교감하며 살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가족을 제외한 인간은 모두 다 친구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해요. 학교 친구, 학원 친구, 회사 친구 등 다양한 수식어가 앞에 붙겠지만요. 가족처럼 사회적 약속으로 묶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친구 관계는 맺고 끊음이 자유롭습니다. 내가 형성한 모든 관계가 나와 성향이 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친구라고 해도 상대방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거나,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친구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어도 이해하고 넘어가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 우리의 세 주인공 사이에도 지난 25년 간의 시간 속에 이해와 몰이해가 수없이 반복되지 않았을까요? 긴 시간 동안 유지하던 관계도 어느 한순간 작은 틈으로 인해 크게 벌어지기도 합니다. 아트는 세 사람의 우정이 사소한 일로 곤두박질쳤다가, 밑바닥을 다 까 보인 상태에서도 다시금 우정이 시작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공연을 보면서 나는 셋 중에 어떠한 사람이었나…싶었는데, 딱 짚어서 세르주 같은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순 없고, 누군가에겐 세르주였다가, 또 누군가에겐 마크, 이반이기도 한 게 사람이지 않나 싶었어요. 세 인물 모두에게 다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공계열답게(항공 엔지니어니까요) 형이상학적 상징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정확히는 아예 할 생각이 없는), 형체를 갖춘 예술을 좋아하는 마크는 세르주의 하얀 판때기에 눈이 내리는 풍경 속 스키를 타는 사람을 그려 넣습니다. 저는 아마도 이게 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추억 중 일부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스키를 타는 남성은 후에 폴라의 특제 민간요법으로 인해 지워지고 말지만, 비로소 마크의 눈엔 세르주의 앙뜨로와에 현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그들이 함께 나누었던 하얀 풍경 속 스키를 타는 추억의 모습을 한 현상으로요. 제가 아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바로 이 결말 부분입니다. 현대미술은 어려워요, 특히 프레임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더더욱 그렇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으로써 현대미술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 못해요. 현대미술은 그 몰이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그 개념 자체가 아직 저에겐 너무 어렵습니다. 제가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는 마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마크는 친구들과의 며칠간의 대환장 쇼 끝에, 오랜 절친인 세르주에게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창피하고 부끄러운 이기적인 속내까지 다 내비치고는 마침내 세르주를 통해서 그의 앙뜨로와를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만의 상징을 통해서요. 이제 마크 눈엔 하얀 캔버스 위에 하얀 대각선도 보일 것이고, 조금 어두운 흰색의 구름과 조금 더 밝은 색의 눈송이도 보일 것입니다. 현대미술을 즐기는 방법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해요. 세 사람의 우정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결말까지 보여줄 수 있음에 너무 감동했고… 아무튼 아트 정말 최고입니다.


오피셜 페어가 총 4 팀에, 크로스 페어까지 합치면 상당히 여러 버전의 공연을 볼 수 있어서 캐스팅을 바꿔가면서 보면 각각의 캐해석이 다 조금씩 달라서 그 차이를 느끼는 재미도 큽니다. 최재웅의 세르주가 엄기준의 세르주보다 훨씬 더 짜증이 많더라고요. 일이 정말 많아서 피곤한 대형 피부과의 원장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엄기준 배우를 너무 좋아해서… 캐해석의 차이로 어떤 세르주가 더 좋다, 이게 되질 않네요. 그냥 엄기준이 제일 좋습니다… 엄기준 배우가 쓰리피스 슈트를 입고 나오니까요. 100분간 보는 재미가 있어요. 그래도 앞으로 다른 두 명의 세르주도 모두 보고 가장 취향에 맞는 세르주를 골라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어떤 상대들과 붙느냐에 따라서도 극의 분위기가 다 달라지기 때문에…그런 점이 정말 너무 재미있는 것 같아요. 2회 차에서는 본래도 절친이기로 유명한 최재웅 박재범 + 박정복 페어로 공연을 봤는데요, 웅범 페어의 미친 애드리브 때문에 공연 시작부터 그냥 너무너무 웃겼습니다… 팔짱 끼고 손으로 박자를 치는 단순한 행동부터도 너무 웃겼어요 서로 신경전을 하고 있었거든요… 워낙 애드리브가 난무하는 공연이다 보니 고작 2번째 관람인데도 처음과 두 번째가 차이점이 엄청났습니다. 보면 볼수록 지루하지 않고 새로운 점이 많이 보이는 공연일 것 같아요. 박호산 배우와 박정복 배우의 이반도 서로 다른 매력이 있었고, 개그 센스와 애드리브는 박호산 배우가 더 매력적이었고, 이반이라는 캐릭터 자체의 성격은 박정복 배우의 해석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박정복 배우의 이반은 어느 정도 단호함과 성깔이 있더라고요, 괜히 세르주, 마크와 친구가 아닌 느낌? 셋 중에 화가 나면 가장 무서울 것 같은 친구였어요. 물론 쉽게 화를 내지 않는 성질을 가졌겠지만… 다음 공연은 성훈/이필모/박정복 페어로 보게 될 텐데, 성훈 배우가 키가 상당히 커서 마크에게 엄청 위협적이지 않을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성훈 배우는 무대에서 본 적이 없어서 어떤 세르주를 보여줄지 기대되고, 필모마크와 정복이반의 합도 본 적이 없어서 기대가 됩니다. 앞으로 몇 번을 더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몇 번의 관람을 모아서 아트 리뷰를 더 작성할 것 같아요. 그냥 하염없이 즐겁게 100분간 웃다가 나올 수 있는 공연을 꾸려주고 있는 배우와 모든 제작진들에게 감사한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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