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값하는 뮤지컬
[극 내용을 필터링 없이 감상평에 사용하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용도 알고 넘버도 다 알고 연출도 다 알고 있지만, 알고 있기 때문에 보고 싶었던 레미제라블을 봤습니다. 이번 시즌 못 보고 지나치는 줄 알았는데 운 좋게 5열을 구해서 다녀왔어요. 블루스퀘어 5열 정도면 무대 전체가 시야에 꽉 차게 들어와서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작년에 오페라의 유령을 보면서 생각한 건데, 고전 작품들은 그에 걸맞은 물리적 환경을 무대미술로 연출해 내는 것이 매력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무대를 구성하는 데에 조명이나 그래픽 빔이 많이 사용되는데, 고전 작품들은 미술 장치로 무대를 채우는 비중이 더 높습니다. 공연예술계 티켓값도 상당히 올라버린 탓에 요즘은 물리적 환경이 충분히 채워진 작품이 좀 더 값어치 있게 느껴지곤 하더라고요. 작년에 봤던 공연 중 하나는 대극장임에도 불구하고 무대를 너무 텅 비우고 그래픽 빔만을 사용해서 지나치게 심심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레미제라블은 넘버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유명해서, 그야말로 귀가 호강한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쏭스루 뮤지컬이다 보니 노래가 마무리되고, 대사를 이어가며 장면이 전환되기보다는 옷을 갈아입든가, 암전이 되면서 장면이 전환되는 부분 들고 많았습니다. 레미제라블 또한 원작을 읽어보지 않아서(이 정도면 원작을 읽어본 게 거의 없는 수준) 얼마나 내용을 축약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한정된 시간과 공간 내에서 음악과 연기만으로 인물의 서사와 감정을 최대한 개연성 있게 전개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고 느꼈습니다. 10여 년 전에 나왔던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영화 쪽이 좀 더 서사 이해에는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무대 공연과 영화를 비교선상에 두는 것은 옳지 못한 것 같으므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역시 학생 혁명군의 바리케이드 전투 장면입니다. 특히 우리의 혁명 전사 앙졸라… 앙졸라는 원작에서도 아폴론이라는 비유가 나올 정도로 자타공인 미남인 캐릭터인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어느 나라에서든 정말 앙졸라의 외관 묘사에 충실한 캐스팅을 하는 것 같습니다. 바리케이드 무대 장치도 정말 완성도 높고 아름다웠고, 최후의 전투에서 바리케이드 위에서 한 명 한 명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일부러 춤을 추듯 연출해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역설적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죽어가는 젊은 청년들의 죽음의 고결함을 묘사하는 것 같았습니다. 영화에선 앙졸라의 죽음 연출이 가장 인상적인데, 무대에서는 바리케이드와 청년들 모두를 하나로 묶어 거대한 예술작품처럼 보이게 하는 것 같았어요.
예전에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가, 이번에 공연을 보면서는 유난히 자베르 경감의 신념과, 그 신념이 무너지는 과정…그리고 자베르라는 인물의 변화와 결말에 유난히 눈길이 갔습니다. 수 십 년간 법을 통한 질서를 지켜오는 것이 정답이라고 믿었던 그가 장발장을 놓아줌으로써 해방과 혼란을 동시에 느끼고, 그 괴리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모습이… 조금만 더 융통성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으면서도, 이 작품의 탄생 시점과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저런 캐릭터인 게 맞다고도 생각이 듭니다. 고전을 보면서 가끔 느끼는 현대와의 괴리는 바로 시대상에서 오는 것 같아요. 그러므로 작품은 그냥 작품으로 봐야 합니다 ㅋㅋ
레미제라블은 우리나라 토지 같은 대하소설 장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장편을 3시간 좀 안 되는 러닝타임으로 줄여놓았으니 얼마나 많은 내용이 생략되었을지는 상상이 가지 않는 수준입니다. 원작의 100% 전체 내용을 읽을 날은 없을 테니, 이런 식으로라도 다양한 매개체로 고전 문학을 감상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있다는 점에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