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 비Bea]

우린 모두 마음맹인이야.

by Curtain 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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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내용을 필터링 없이 감상평에 사용하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연을 보면서 엄청 많이 울었던 기억이 딱 두 번 있는데, 16년 뉴시즈와 17년 킬미나우입니다. 뉴시즈는 그냥 개인적으로 너무너무 좋아했던 공연이라, 총 막공 날 아쉬운 마음에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그때도 이미 직감적으로 이 공연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던 것 같습니다(뉴시즈 재연을 기다린 지 8년째…). 킬미나우는 당시에 정말 유명했던 공연입니다. 눈물 콧물 쏙 빼기로요. 이것도 가끔 그리운데.. 코로나 시절 이후로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아무튼, 공연을 보면서 정말 눈물을 흘렸다,라고 볼 수 있을 법한 경험은 위 두 번이 전부입니다. 이번에 본 연극 비도 킬미나우만큼 정신없이 울고 나오는 사람이 많기로 유명한 공연이에요. 울 수도 있다는 예상을 하고 가서 그런지 결과적으로는 울지 않긴 했지만… 어쩌면 관객이 울지 않고 비의 이야기를 끝까지 관람하는 것이 이 작품의 핵심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물론 우는 사람 많습니다 저만 안 울었을 뿐…)


문명과 기술의 발전으로 다양한 간접 경험이 가능해진 시대지만, 여전히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기가 어렵습니다. 하다못해 요즘 자주 일어나는 장애인 지하철 시위만 해도 하필 출근길에 왜 이러냐는 비난을 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해요. 요즘은 우울증으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죽고 싶은데, 나 스스로 나를 죽일 수도 없는 상황의 사람들도 있어요. 오늘 이야기할 작품의 주인공 비가 그렇습니다.


무대가 암전 되고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비는 침대 위에서 미친 사람처럼 춤을 췄습니다. 저러다 침대에서 떨어지는 거 아냐? 싶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비는 퀸 사이즈 정도 되는 침대 위를 절대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8년 전부터 150*200짜리 프레임 안에 갇혀있어요. 그마저도 우리는 비의 내면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침대 위를 마음껏 뛰어다니는 모습으로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지만, 사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원인 모를 체력저하증으로 인해서요. 비는 해맑고 그늘 없는 표정으로 죽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겐 그렇게 보이지만, 실제 비는 “나 죽고 싶어”라는 말도 똑바로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간병인 레이의 도움을 통해 엄마에게 말합니다. 나, 죽고 싶어.


아주 어릴 때 들었던 말 중에, 이타심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라는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어릴 때는 그저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만족이라는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행동”이라고 해석했던 것 같아요. 13살 정도의 어린이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개념이기도 했습니다… 작품을 보는 내내 이 말이 계속 떠오르더라고요. 지능을 가진 사람이, 완벽하게 스스로를 배제하고 타인에게 공감하고 타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 어떤 공감도 100% 완벽할 순 없습니다. 자아가 있기 때문에 늘 타인의 경험과 의견에 자신을 투영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작품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마음맹인 이라고 말합니다.


엄마 캐서린과 딸 비는 둘 다 서로에게 마음 맹인입니다. 캐서린은 죽고 싶어 하는 비의 마음과 지난 8년간의 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는 엄마로서 딸을 죽이는 것이 캐서린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외부인이 끼어들기 어려운 두 사람의 관계에 손을 얹은 간병인 레이는, 자신이 두 모녀 사이의 외부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레이는 두 여자의 오감이 되어, 비가 하고 싶은 말, 캐서린이 추억하는 과거, 비가 하고 싶은 것, 캐서린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서로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손을 뻗어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캐서린이 비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마음먹습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캐서린이 자연스럽게 비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닌, ‘이해하고자 결심’ 했다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캐서린에게 있어서 비의 소원을 들어주고 난 뒤의 앞으로의 자신을 배제한 완벽한 공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괴롭고, 후회할 것인지 충분히 알면서도 그 모든 것을 감내하기로 각오하고 비의 마음을 향해 눈을 뜨고 시선을 맞춘 것입니다. 이기에서 비롯되지 않는 비를 위한 순수한 이타적 행동으로요.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침대 위를 절대 벗어나지 않던 비가, 엄마가 주는 약을 먹고 마침내 육체에서 해방되며 침대를 벗어나 땅바닥에 첫 발을 내딛고, 미친 듯이 집 안을 휘젓고 다닙니다. 그리고 점점 비가 활보하는 공간은 집에서, 더 큰 어떤 영역으로 전개됩니다. 마치 옛날에 살았던 집의 사과나무가 있는 마당으로요. 캐서린은 소리 없이 울고 있지만, 마침내 해방된 비는 그저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죽음은 슬픈 일이 아니라서, 비가 춤추고 기뻐하는 만큼 보고 있는 저도 후련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네가 괜찮다면, 굳이 여기서 슬프게 울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캐서린의 선택 또한 지금 내가 여기서 울지 않음으로써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했습니다. 캐서린은 비를 죽게 한 것이 아니라 풀어준 것입니다. 그녀 스스로는 그녀가 원하는 선택을 할 수도 없는 가여운 딸을 위해서 말이에요. 이 이야기는 주인공 비의 시점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에게 이해받고, 원하는 것을 이루어 즐겁게 춤을 추며 끝나게 됩니다. 잔디밭을 마구 뛰어다니며 기쁨에 소리 지르는 비를 보니까 왠지… 그냥… 슬프지 않더라고요. 그런 공연이었습니다.


더불어 여담이지만… 처음 가 본 신축 엘지아트센터가 너무너무 멋있었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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