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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미 Nov 04. 2021

애도일기 (1)

8살 때 아빠가 급작스레 돌아가셨다.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너무 어릴 때라서 아빠 장례식은 못봤고 돌아가신지 한달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동강 다리에서 나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울며 약속했다. 엄마가 우리 가족 지킬테니까 보미가 동생들을 잘 돌봐줘야해. 나는 울면서 알겠다고 했다. 나는 사남매의 둘째이자, 언니가 10년간 유학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스무살까진 거진 첫째였다.


아빠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다. 당시 6살이었던 셋째가 낱낱이 기억하는 걸 보면 신기한 일이다. 아빠가 나를 가장 사랑했다고 하는데도. 나를 안고 있는 뒷모습은 멀리서 봐도 사랑이 가득했고, 오죽하면 첫째언니가 나를 많이 질투했다고 했다. 내가 엄마의 고통스러운 10년 끝에 나온 자식에다, 내가 태어나면서 아빠의 병원을 개업하게 되고, 여러가지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게다가 아빠는 책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런 점이 아빠와 내가 가장 많이 닮은 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를 많이 예뻐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내게 아빠는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되어 있었다. 중학교 때는 묘소에서 "아빠 미안해, 내가 아빠 까먹었어."하고 운 적도 있다. 아빠가 분명 내 생에 존재했는데 애초부터 없었던 사람 처럼 살아왔던 게 미안했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는데도. 나는 왜이럴까 싶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가 상상인지 진짜 추억인지 모르겠어서 항상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무언가 막힌 것처럼, 아빠에 대한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가 않았다.


가부장적이었던 아빠를 생각해보면, 살아계셨어도 많이 다퉜을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엄마는 시댁살이를 하느라 고된 15년을 보냈고, 아빠는 엄마의 희생에 기댔다. 내가 아빠와 함께 살았어도 페미니스트가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많이 싸웠을 것 같다. 하지만 살아계셨다면 엄마가 변했듯 많은 곡절을 통해 아빠도 변했을 것이다. 다퉜을 거라는 건 그저 나의 희망사항이었을지도 모른다.


상담을 받으면서 점점 아빠에 대한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의 많은 부분들이 그 상처로부터 오기 때문이었다. 남자를 쉽게 믿고, 의지할만한 구석이 보이면 나를 던져버리고, 그래서 존중받지 못하는 연애를 하고. 남자 선배를 따르고, 그의 말이 전부 진실인 양 내 머리로 판단하지 못하고. 과도하게 의존하고. 그 모든 것들이 아빠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차츰 알게되었다.


선생님은 아빠가 떠난 빈자리가 사무치게 시리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너무 아프고 힘든데, 모순적이게도 나는 그 마음을 외면하고 있었다.


기억하면 뭐해요. 어차피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볼 수 없는데.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서 실토한 속마음은 이랬다. 기억하면 뭐하냐는 것. 달리 말하면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것. 기억해봐야 슬플 뿐이니까. 슬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슬펐던 거였다. 기억하는 것이 고통일 정도로 충격적인 슬픔.


아무리 어릴 때의 일이더라도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나의 판단이었을 거라고 하셨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워서,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 마음이 해소되지 못하면 지금처럼 성인 남성에게 과도하게 의지하고, 의존하고, 나를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해요?

그 마음을 봐주어야 해요. 그리고 슬퍼해주세요.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달아날 수 없어져요.


그 과정을 바로 애도라고 부른다고 했다.


정신과의사 Bowlby는 애도반응이 4단계를 거쳐 나타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충격을 받고 무감각해지는 시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를 부인하면서 분노가 치미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감각이 멍해져서 넋을 놓고 지내기도 합니다. 헤어짐이 갑작스러웠던 경우 이 시기는 더 길고, 예정되어 있던 것이라면 이미 경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고 되찾고 싶어서 찾아 헤매는 단계입니다. 그 사람과 친분이 있었던 사람을 찾아 헤매거나, 헤어진 연인이라면 연락을 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 생각에 몇 일 밤을 새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좌절감, 분노, 슬픔을 크게 느낍니다.

셋째,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우울, 절망감을 느끼는 단계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들고, 만사가 귀찮고, 우울, 불면, 식욕저하 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넷째, 점차 자신의 생활을 회복하면서 자신을 추스리는 단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떠올리면 슬프지만 함께 있었던 기쁨도 느낄 수 있고 덤덤해지게 됩니다.

애도반응은 보통 6개월 내지 1년이 걸린다고 하나 어떤 느낌이나 생각들은 1-2년 이상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 정상적인 애도반응은 치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상실에 적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다는 것은 인생의 큰 스트레스이며, 애도 과정 중 우울, 불면, 피로, 안절부절, 죄책감, 식욕부진, 흥미 감소 등의 우울증상이 만성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7% 가량에서 보입니다. 이 경우는 일반적인 우울증에 준한 치료가 필요합니다.

- 서울 아산병원, <애도반응>


아빠에 대해 무감각하고, 원래 없었던 사람 같고, 아무렇지 않았던 것은 애도의 1단계 반응에서 멈춰있었던 것이다. 상실에 대해서 이러한 4단계를 거치지 못하면 뚜껑으로 닫아놓은 것처럼 속에서 곪아가게 된다. 차라리 분노하고 울면 모르는데, 나처럼 그저 침잠하는 음성 반응이 외로이 우울감을 느끼기가 쉽다고 한다.


그러니 나를 위해, 이 슬픔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때를 상기해보아야 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마음 가는 대로.




그립다. 보고싶다. 아빠가 살아있었으면 나를 또 그렇게 꼬옥 안아주었을텐데. 그게 아니더라도... 살아있을 때 나를 그렇게 꼬옥 안아주었지. 아빠는. 나를 사랑해주었지. 가슴이 아프다. 아쉽다. 울 것 같다. 그래서 참았구나. 울지않으려고.


"아빠는 나를 많이 사랑했어. 그때 참 좋았지. "라고는 말한 적이 한번도 없다. 항상 들었거나 그래도 믿지못했거나 추측했다. 그래, 그때 참 좋았다. 아빠 냄새, 듬직한 등, 내 몸을 받치고 있는 단단한 팔, 내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나에게 부비는 볼, 따끔한 수염.


아빠가 잔뜩 술을 마시고 왔을때도, 온몸 가득히 풍기던 술 냄새, 사랑한다고 뽀뽀하던 입술, 따끔거리던 수염, 차가운 겨울냄새가 풍기던 서늘한 코트 자락. 아빠, 양말 벗고 자! 하고 호통치면 졸려죽겠다며 일어나지 않던 아빠. 엄마의 특명을 받아 아빠 발에서 양말을 당겨 벗겨내고. 지금 생각하면 양말 다 늘어났을텐데. 그때 참 좋았지. 그치, 엄마. 그때 참 좋았지 아빠.


아빠가 죽고, 엄마는 일하러떠나고, 안정적인 경제환경도 없어지고, 엄마는 힘들어지고, 애들은 내가 돌봐야한다 그러고, 엄마도 내가 챙겨야겠고, 이게 왜 이렇게되는건지, 왜 내가 좋아했던것들은 다 없어지고 왜 이렇게 되는건지 너무 묻고싶은데.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왜 이렇게 되는거에요? 왜? 나 너무 슬프고 아쉬운데 왜 이렇게 되는거에요?


이유를 찾지못하고 그래서 슬퍼하지도 못하고 그저 적응하고 내몫을 다하느라 물음표가 달린채로 살아왔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몰라서 움츠러들고 눈치를 봐왔다. 이제는 나를 이해한다. 그럴만하다. 벌써 10년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괴로웠다. 이제 보내야 하는데 보내지지가 않아서.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덮어두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러니, 나에게 슬픔을 허용한다. 울고, 또 울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어도 괜찮다. 나는 이렇게 슬퍼할만큼 아프고 힘들었던 것이다.




여러번 생각했다. 어릴 때 부모님 중 한 분이 돌아가시는 일은 정말 흔하지 않나? 이런 것 가지고 이렇게 아프다고 말해도 되나? 나는 버려진 것도 아니고, 가난하게 살지도 않았는데? 우리 엄마는 우리를 먹여살리기 위해서 정말 뼈를 갈아서 노력하셨는데, 내가 이렇게 아팠다고 하는 것이, 엄마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상처가 될 생각이지 않나? 나보다 10살 많은 우리 언니는 훨씬 더 고생했는데? 동생들은 어쩌고? 걔네도 나만큼 힘들텐데, 아빠 얘기 한 적도 없는데? 걔네도 아프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상담에서 이야기라도 하지만, 걔네는 계속 곪아있지는 않을까? 지금 엄마는 생계를 위해 부잣집 사모님에서 식당 사장님으로 일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수없이 괴로웠을 텐데, 고작 아빠를 잃었다는 상실감뿐인 내가 이정도로 아프고 슬퍼해도 되는걸까?


선생님은 그래도 된다고 했다. 아픈 건 아픈거고 슬픈 건 슬픈거에요. 어른인 엄마에게도 힘들었을 텐데, 언니에게도 힘들었을 텐데, 아직 어린아이인 혜인씨에게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세상이 무너지는 고통이었잖아요. 가난도 객관적으로 어떻다보다는 혜인씨가 느꼈던 것이 더 중요해요. 그렇게 부자였는데, 확연하게 달라진 세상이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브런치를 시작하며, "잘 자란 네가 왜 우울해하니?"라고 첫 글의 제목을 썼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랫동안, 나 정도는 슬퍼할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다른 일에 있어서는 '슬퍼할만 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유독 이 일에 대해서는 그게 잘 안됐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슬퍼할만 하다. 감정은 나에게는 정답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거기에 비교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은 누구에게나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슬프고 우울했다. 상실감에 가슴 속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마치 서늘한 공기가 그 구멍을 투과하는 것 같았다.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어깨가 춥고 시렸다. 든든한 지지대를 찾고 싶었다. 이 구멍을 메울 사랑을 찾고 싶었다. 내가 사랑받을만한 사람이 된다면 다시 누군가가 그렇게 나를 지켜줄 것 같았다. 사랑받지 못한다면 이 거대한 슬픔으로부터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많이 컸다. 나의 슬픔을 받아들일만큼 컸다. 이것을 받아 안아도 무너지지 않는다. 내 곁에는 내가 있다. 이 공허한 마음도, 결국은 내가 방치했기 때문이다. 내가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끝없이 깊어졌던 것이다. 나는 나의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나를 지지해주는 것들로, 나를 안아주는 이들로 내 세상을 채울 수 있다. 그곳에서 나는 따스한 공기가 볼을 스치고 폐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이제 나는 어린 보미의 울음 섞인 질문에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안아주고 위로해줄 수 있다. 너무 힘들었구나. 슬펐구나. 그래서 절규하고 있었구나. 그동안 알아주지 않아서 미안해. 이제 내가 네 옆에 있어줄게. 아빠가 돌아가신 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뭔가 아빠 말을 듣지 않아서, 잘못해서 가신게 아니야. 아빠의 삶은 아빠의 삶이고 나의 삶은 나의 삶이야. 아빠는 성인이었고 스트레스, 과음, 가족을 부양하려는 마음같은 것들, 아빠가 선택하셨던 거야. 사랑스럽고, 고마운 마음이지만 건강을 챙기셨으면 좋았을 것 같지.


아빠와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잃어버린 나의 안식처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지금 아빠를 만난다면, 잘 자랐다고 해줄 것이다. 나는 툴툴댈 것이다. 조금만 늦게 가시지 그러셨느냐고. 아빠는 웃으며 나를 안아줄 것이다. 나와 닮은 나의 딸, 너는 행복하라고. 잘 살라고. 언제나 응원하겠다고. 분명히 그러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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