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공 무스펙의 HR 취업기 (1)
취업에 성공했다!
시민단체에서 근무하던 중 여러가지 고민을 통해 사기업 취준으로 전환한지 1년 1개월, 인사 담당자로의 취업에 성공했다. 그 후기를 간략하게 풀어보고자 한다.
왜 HR이었는가?
스무살 때, 세월호 집회에 처음 참석했다. 그 때가 1주기 첫 추모 집회였나 그랬다. 내가 생각했던 집회의 모습은, #쇠파이프 #경찰 #혈투 #싸움 그런거였다. 그런데 막상 참여해보니, 추모집회라 그랬겠지만 너무나도 평화롭고 서글펐고 아팠다. 그런데 집회 참여 중 기사를 보니, 내가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기사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 때, 집회에 실제로 참여하는 사람들과, 기사로 접하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느꼈다. 처음으로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다.
이후로 농활에 참여하면서 FTA (당시에는 TTP인가 그랬음)로 인해 실제 농민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 지도 봤다. 멀리서 기사와 자료로 접하는 농민들의 모습과, 실제로 만나는 농민들의 모습은 달랐다. 2016년인가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지고, 페미니즘이 화두가 되기 시작했다. 이를 접하면서 내가 경험해온 부당함들의 심각성을 깨달았고, 나는 페미니스트로 각성했다. (인사담당자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인문학 동아리 회장도 하고, 마침 돕고 있던 인문대학 학생회의 당선과 더불어 인문대학 학생회장도 하고. 이후에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다가, 총학생회 집행위원장도 했다. 내게는 학생회라는 것도 단순히 "학생들의 복지를 잘 챙기자"가 아니라, "학생들이 진짜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위치에서 직접 바꿔보자"에 가까웠다. 나의 그 모든 활동을 관통했던 것은, 나의 정체성인 여성, 학생, 시민으로서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직접 바꾸자, 그것을 혼자가 아닌 조직의 힘으로 바꾸자, 라는 생각이었다. 혼자서 할 수 없는 것도, 집단과 조직과 공동체의 힘으로는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여러가지 활동을 하다가, 총학생회 집행위원장은 중간에 그만두고 나오게 되었다.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이러다간 내가 죽겠다 싶어서 그만둠을 택했다. (그 뒤로 너무 미안해서 총학생회실 근처에도 갈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같이 친하게 지낸다.)
▶ 죽기 전에 여길 나가야 했다
https://brunch.co.kr/@phi4267/27
그럼에도 그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 내게는 "시민단체 활동가"라는 꿈이 생겨 있었다. 당장 활동가로 취업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당시에 자취를 하고 있었기에 돈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한 여성단체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약 2년 정도. 그 단체의 취지와 비전에 공감하고 있었고, 활동가로서 쭉 살아갈 생각이었기에 앞으로도 계속 일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남자친구가 생겼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가진 생각들에 공감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그 때는 왜 내 생각을 이해를 못하지? 왜 공감을 못하지? 싶어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무시하지 않고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질문을 던졌던 것이었다.
그렇게 약 2년간의 수많은 싸움이 지나고, 내 생각도 많이 변하게 되었다. 나는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고, 생각보다 그 바탕이 견고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활동을 하고 있는거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나의 결론은, 내가 활동가를 하고싶었던 이유는, 그 비전에 공감해서도 있지만,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이 좋았기 때문이었다는 거였다. '좋음'을 넘어서, 그 사람들을 가족같이 여겼고, 따라서 그 가족들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싫었다. 그러니 이성적인 사고가 부족했다. 감정적일 수 밖에 없었다.
(*첨언하자면 내가 그랬다는 것이고, 이성적인 판단 하에 평생 활동가로 살고자 하시는 분들은 수두룩빽빽하다.)
남자친구이기는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나는 그에게 남자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됐다. 같이 맛있는 걸 먹는게 즐거웠고, 여행을 가는 게 즐거웠고, 삶을 함께 꾸려가는게 즐거웠다. 그걸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당시 나는 식대 없이 월 150만원을 받고 있었는데, 그걸로는 부족했다. 앞으로 그와 함께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려면, 돈을 아주 많이 벌고 싶어졌다. 비전과 신념도 좋지만, 내가 내 생각보다 더 연봉과 금전에 민감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원래는 "월 200만 벌면 되지~ 나는 그래도 살 수 있어!"라고 생각해왔는데, 그래서 활동가로 살고자 할 때 돈이 얼마나 적든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많이 봐왔지만, 그게 나는 아니었다. 그것을 깨달은 시점이, 진로를 바꾸어 사기업으로 취직해야겠다고 생각한 시발점이 되었다.
진로를 바꾸고자 했을 때, 여러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1) 급여를 더 많이 주는 시민단체, 노조 등
-> 이미 금전에 대한 욕구가 눈을 뜬 시점에서, 이쪽의 급여는 아무리 올라가봤자 그렇게 높은 수준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 돈을 많이 받더라도, 학위가 있거나 어디 대표거나 해야될텐데, 그건 너무 멀어보였다. 게다가 내가 본 대표님들은 돈을 많이 받지도 않았고, 많이 받는다 해도 그 이상의 삶을 그 단체와 활동에 쏟아붓고 있었다. 돈을 많이 벌려고 대표가 되겠다는 생각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2) 공기업 vs 사기업
-> 공기업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나는 내가 어떤 일을 해서 전문성을 쌓고, 그것을 바탕으로 급여가 올라가길 바랬다. 공기업에서 근무지가 바뀌거나 하는 것도 싫었고, 이왕 공적인 일을 안할거라면 그냥 돈만 보고 가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기업 취준을 택했다.
3) 사기업에서의 직무 선택
-> 직무 목록을 쭉 봤다. 영업, 마케팅, 회계, 인사, ... 문과로서 갈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일단 마케팅은 대학생 때 공모전이고 뭐고 없다는 점에서 탈락이고, 영업은 성격적으로 그렇게 잘할 자신이 없었다. 회계도 숫자에 취약해 문과를 온데다, 학생회 때부터 회계라면 거리를 두고 온 시점에서 탈락. 내가 가진 스킬 중 홍보물 만들기나 영상 편집도 있었지만, 그건 실력을 높여서 급여를 높여내기에는 무리스러워 보였다. 디자이너로 성장하려면 자기가 만드는 것을 더 잘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어야 될텐데, 나는 그런 건 없고 그냥 하나하나 적당히 만들어서 쳐내는 수준이었다. 그정도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탈락.
그렇다면 내가 가진, 남들보다는 조금 더 나은 수준의 강점을 가지고 도전해볼 수 있다고 생각된 것이 바로 HR이었다. 동아리 회장, 단과대 학생회장, 총학생회 집행위원장으로 조직운영을 해본 경험이 많았고, 이 구성원들이 어떻게하면 더 잘 적응하고 / 더 잘하고 싶고 / 더 머무르고 싶은 조직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HR에 대해 알아볼수록, 이 직무의 궁극적인 취지도 그와 비슷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