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몰아내는 법(광복 80주년)

제국의 어린이들 - 이영은

by off

"아이고, 일본 사람들은 얼마나 깨끗하던지."

39년생 시어머니는 슬쩍 눈치를 보는 듯 하나 일본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으신다.

"에이 어머니,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되지." 나도 입가가 파르르 떨리지만 웃으며, 끝말을 반말로 얼버무리며 반감을 숨기지 않는다.

" 야야. 내가 왜 이 말도 못 해? 일본 사람들 가고 나서 동네가 다 더러워지고 사는 게 힘들었구먼. 일본 덕에 기차도 생기고 좋았구먼. 쌀도 많이 나고"

더 마음이 상하기 전에 작전을 펼친다. 시어머니께 어린 시절 뭐가 기억나시냐고, 자꾸 말씀하셔야 치매 안 걸린다는 말을 잊지 않으며 묻는다. 어머니는 눈을 살짝 흘기고 못 이기는 척, 꿈을 꾸듯 소녀 시절 이야기를 하신다.

막내 동생을 업어 키운 이야기, 아래 여동생을 떼어놓고 산으로 들로 놀러 간 이야기, 배가 고파서 부자 친척집에 1시간을 걸어가 얻어먹은 서러움, 기차를 처음 탄 기쁨, 흰쌀밥의 향기 등을 쉬지도 않고 이야기하신다.

일본 찬양은 싫은데, 어머니의 이런 이야기는 듣기가 좋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노인분들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얼굴 표정을 좋아라 한다. 물론 민감한 정치, 역사적 견해가 다를 때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기 위해 써먹는 술수이기도 하다.


어른들이 어린 시절을 말하는 표정은 어둠 속 '탁' 전구가 켜지는 순간을 닮았다. 꺼져가는 영혼에 시들어가는 일상에, 순간 빛이 들어온다. 아련한 추억의 빛이다. 어른 시절은 중간은 없는 것 같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으로만 기억된다. 그래서 더 아련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어린 시절이 있고 조금씩 모두 다르다. 그리고 달라 보여도 닮아있기도 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들의 삶은 [안네의 일기]의 안네와 많이 닮아 있다. 어른들이 벌인 전쟁 때문에 어둠에 갇히고 아픔을 겪어야 했고 견디며 큰다. 다만 안네의 어둠이 좁은 공간이고 조선 어린이들의 어둠은 밝은 태양아래 그늘이다. 그늘은 밝음과 대조되어 더 어둡게도 보인다. 아니다. 어둠은 비교 대상이 아닐 것이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드리운 어두운 장막에서도 숨기 놀이, 숨어서 바닥에 낙서하기, 숨죽이고 깔깔거리기 등을 하며 논다. 어른들에게 영향을 받지만 숨겨진 순간의 시간을 찾아내서 천진난만하게 놀며 지낸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들을 글로 남기기도 한다. 안네가 일기를 쓰듯. 전쟁의 시간을 살아낸 한반도의 어린이들도 글을 쓴다. 일본 어린이. 조선 어린이 모두 한반도에서 글을 썼다는 사실이 저릿하다.


역사 속에서 어른들의 만행은 공간과 시간을 같이 살아낸 아이들을 보호하지 않고 강제로 계급을 만들고 '경계'를 만든다. 제국의 아이들 속 일본 어린이, 조선 어린이는 비슷한 불안을 겪지만 완전히 다른 글을 쓰기도 했다. 일본 어린이는 학교를 다니지만 조선 어린이는 수업료를 빌려 다녔다. 일본 어린이의 아버지는 백화점에 데려 가지만 조선의 아버지는 방에서 앓았다. 그러나 두 나라의 모든 어린이들은 폭탄소리, 총소리는 무서웠고 동생이 병으로 죽었고 전쟁터에 나간 형, 오빠들은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주체한 글쓰기 대회의 수상 글들은 당연히 일본을 위한 글이다. 하지만 어린이들의 글은 시대의 진실들을 모두 가리지는 못했다. 특히 가장 먼저 나오는 우수영 어린이의 [수업료]라는 수필은 크게 눈물 나게 했다.

"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서 외롭지 않았지만, 단지 자동차가 지나갈 때 심한 먼지를 내거나, 자동차에 타고 있던 저만 한 아이가 캐러멜 빈 상자를 던져 준 것은 속이 상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수영 어린이 보다 더 속이 상했다. 내 아이가 놀이터에서 힘센 놈한테 맞고 와서 내 잘못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아 속에서 천불이 났다. 어른들이 만든 어둠과 계급의 경계 속에서 적응하기 위해 순응을 택했던 우리 조선의 아이들이 아깝고 불쌍해서 오랫동안 속상할 것 같다. 혼란하고 불안한 시대와 달리 아이들의 글들은 서성적이고 천진했다. 하지만 일본 어린이들의 글에 비해 우리 아이들의 글은 너무 어른스럽고 착하고 죄책감이 가득했다.


광복 80주년이다. 마지막 장 작가의 말처럼 80년 훨씬 그 이전 어린이들에게 드리웠던 '어둠'의 소리가 지금 우리 어린이들 귀에 들릴 것이다. 80년 전 용기 있는 어른들이 해낸 일들에 전혀 관심이 없는 비겁한 어른들이 만든 컴컴하고 음습한 소리들이 말이다.


'힘이 약하니 식민지는 어쩔 수 없는 거 아냐?'

'일본 때문에 이만큼 발전했지.'

'지금 일본 국민은 무슨 잘못이야?'

'사죄보다는 보상 아냐, 사죄받는다고 뭐 달라져? 돈이 최고지'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달라고 하고 싶다. 우리도 어린이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알고 있다. 어리다고 눈과 귀가 없지 않다는 사실.

어린이들은 진실에 가까워질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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