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날아드는 '감정의 오물’
영화 《인턴》의 주인공 벤(로버트 드 니로)을 기억하십니까?
영화 속에서 그는 젊은 CEO 줄스(앤 해서웨이)의 남편이 외도하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무례한 젊은이들과 마주하는 순간에도 결코 평정심을 잃지 않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여유와 절제가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시니어 인턴'이죠. 그는 타인의 무례함이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게 두지 않는 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그리 여유롭지 않습니다.
출근길 좁은 골목에서 막무가내로 경적을 울려대는 운전자, 공들여 쓴 기획안에 냉소적인 한 줄을 남기는 직장 상사, 혹은 SNS에 달린 근거 없는 비난 댓글까지.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타인이 던진 '감정의 오물'에 휩쓸릴 순간을 맞이합니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거나 무례하게 대할 때, 마음이 즉각 반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그 감정에 오래 머물수록, 상처는 상대보다 오히려 나 자신에게 더 깊이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노 말고 다른 선택은 없을까
이럴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관점이 하나 있습니다. 다소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요지는 단순합니다.
사람은 각자가 ‘옳다고 믿는 생각’에 따라 행동한다는 이해입니다.
누군가 무례하게 구는 이유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내면의 혼란이나 결핍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떠올리면, 우리는 분노를 자동으로 선택하지 않아도 됩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평온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마음속을 걸어 들여다보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명상록》에서 이런 조언을 남깁니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상상해 보라는 것이죠.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 보라. 그러면 네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그리고 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서툰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명상록》 9.18)
그들의 내면을 떠올려보면,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말에 모든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비난은 나의 가치를 겨누는 칼날이 아니라, 그저 그들 마음속 혼란이 잠시 밖으로 흘러나온 소음에 가깝기 때문이라는 거죠.
소크라테스가 웃어넘길 수 있었던 이유
소크라테스의 일화는 이 같은 태도를 유머로 압축해 보여줍니다.
시장에서 모욕과 폭행을 당하면서도 평온을 유지하던 그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참을 수 있느냐고요. 소크라테스는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고 전해지죠.
“만약 당나귀가 나를 발로 찼다면, 자네는 내가 그 당나귀를 고소하길 바라겠나?”
그에게 무지한 사람들의 공격은 자연현상과도 같았습니다.
에픽테토스 역시 누군가 자기를 험담하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내 다른 약점들은 몰랐나 보군. 알았으면 그것까지 말했을 텐데"
상대의 모욕을 '나에 대한 평가'로 수신하지 않고, '상대의 무지'라는 발신지로 되돌려 보낸 것입니다.
악의는 없다, 오직 무지가 있을 뿐
현대 인지행동치료(CBT)는 비합리적인 판단을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이 지점에서도 소크라테스의 명제는 역시 도발적입니다.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악덕이라 부르는 많은 행동은 그 행위자가 정말 나빠서라기보다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에게 이로운지 모르는 ‘무지’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는 시각입니다. 시력이 나빠 색을 구분하지 못 하는 사람을 처벌할 수 없듯, 지혜가 부족한 상태에서 나온 행동을 무조건 증오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설령 누군가 정말 고의로 나를 괴롭혔다 하더라도, 그를 증오하는 태도는 내 마음에 독을 남길 뿐입니다. 반면 그를 길을 잃고 혼란에 빠진 인간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최소한 내 마음의 균형을 지켜줍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지켜낸 선택
이런 태도가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느껴지시나요?
그렇다면 제임스 스톡데일(James Bond Stockdale, 1923-2005) 장군의 사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하노이 감옥에서 7년 반 동안 포로로 지내며 혹독한 고문을 견뎌냈습니다. 포로가 되기 3년 전 지도교수의 권유로 읽었던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이 그에게 생존의 철학이 되었지요.
그는 자신을 고문하던 담당관을 회상하며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그의 내면에 선량함이 남아 있음을 느꼈다. … 그는 명령에 따라 나를 여러 차례 로프에 걸었지만, 내 부러진 다리를 다시 부러뜨린 것은 실수였다고 확신한다."(Thoughts of a Philosophical Fighter Pilot, 231-232)
물론 이것은 가해를 정당화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을 고문하는 고문관을 '나를 파괴하려는 악마'가 아니라 '명령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 애쓰는 한 가여운 인간'으로 규정하기를 선택했던 거죠. 이 지독하리만큼 철저한 스토아식 선택이 그를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게 했습니다. 1973년 석방될 당시 그의 육체는 고된 수용소 생활로 가족들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노쇠해졌으나, 정신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정복당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내 마음의 열쇠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결국 타인의 비난에 흔들리는 것은 나의 판단이 그 비난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에픽테토스는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누군가가 네 몸을 길에서 만난 아무에게나 노예로 넘긴다면, 너는 분노할 것이다. 그런데 왜 너 자신의 판단을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넘겨, 그가 너를 모욕할 때마다 네 판단이 혼란스러워지고 어수선해진다는 사실에는 부끄러워하지 않는가?(《엥케이리디온》 28).
타인의 의견은 우리의 통제 범위 밖에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부여한 나의 '판단'입니다.
오늘 누군가 당신의 마음을 어지럽혔나요?
그를 미워하는 데 에너지를 쓰기보다, 에픽테토스처럼 가볍게 이렇게 말해 보는 건 어떨까요.
"저 사람은 아직 내 다른 단점들을 몰라서 저 정도만 말하는 거야."
오늘도 당신은 평온할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의 평온은 타인의 입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단단한 판단 위에 놓여 있으니까요.
(P. Hadot, Philosophy as a Way of Life와 D. Robertson, The Philosophy of Cognitive-Behavioural Therapy (CBT): Stoic Philosophy as Rational and Cognitive Psychotherapy 등을 참고하여 정리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