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굿 윌 헌팅>이 말해주지 않은 심리치료의 비밀
영화 <굿 윌 헌팅>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을 꼽으라면, 아마도 상담사 숀(로빈 윌리엄스)이 천재 소년 윌(맷 데이먼)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대목일 것입니다. 처음엔 냉소로 버티던 윌은 이 문장을 여러 번 듣고서야 끝내 무너집니다. 오열하는 윌을 끌어안는 숀.
우리는 이 장면에서 깊은 치유의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심리치료는 결국 진실을 말해주는 과학이구나.”
그런데 이 장면을 감동이 아니라 사실의 문제로 바라보면 어떨까요?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은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한 진단인가요, 아니면 상처 입은 한 청년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강력한 위로의 표현일까요? 만약 윌이 이 말을 끝내 믿지 않았다면, 혹은 숀이 따뜻한 눈빛 대신 하얀 가운을 입고 뇌 스캔 결과지나 통계표만 내밀었다면, 윌은 치유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이 눈물겨운 장면을 니체 같은 철학자가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아마 특유의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거 참으로 위대한 '신화'로군. 어쨌거나 그 신화가 소년을 살렸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 소개하려는 책, 제롬 프랭크와 줄리아 프랭크의 <<설득과 치유(Persuasion and Healing)>>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심리치료의 전제를 흔듭니다. 이 책은 심리치료가 늘 내세워 온 ‘과학적 권위’의 화려한 커튼을 과감히 걷어내고 그 뒤에 숨겨진 또 하나의 얼굴―현대적 신화와 설득의 힘―을 드러냅니다.
실패해도 폐기되지 않는 기묘한 이론들
과학적 이론은 실험을 통해 틀렸음이 증명되면 폐기됩니다. 하지만 심리치료의 세계는 조금 다릅니다. 치료가 성공하면 "내 이론이 옳았다"고 자랑하지만, 실패하면 "환자가 치료에 저항했다"거나 "아직 준비가 안 됐다"며 이론 밖의 이유를 댑니다. 실패의 책임은 늘 이론 바깥으로 빠져나가버리죠.
역사상 어떤 심리치료 학파도 "우리 이론이 틀렸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니 자발적으로 해체하겠다"고 선언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조차 자신의 이론을 "우리의 신화학"이라 불렀습니다. 실험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질 때 비로소 작동하는 이야기(서사)라는 거겠죠.
"모두가 이겼고, 모두가 상을 받을 것이다"―도도새의 결론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수백 가지가 넘는 심리치료 이론 중 과연 어떤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임상 결과를 종합한 메타 연구들은 의외의 결론을 보여줍니다. "어떤 이론을 선택하든 평균적인 효과는 거의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도도새의 결론(Dodo Bird Verdict)”이라고 부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도도새가 경주를 마친 후 “모두가 이겼으니 모두가 상을 받아야 해”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특정 이론의 정교한 기법보다 상담사와 내담자의 관계, 신뢰, 그리고 희망의 고취, 즉 모든 치료가 공유하는 ‘공통 요인’이 치유의 본질임을 시사합니다. 즉, 이론의 과학적 타당성보다는 그 이론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 '치유의 신화'로 기능하느냐가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제기되어 마땅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이론이 옳은가가 아니라, 어떤 이야기가 이 사람을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가?’
흰 가운과 쥐 실험: 현대인의 새로운 토템
중세 유럽에서는 신앙이 마음을 치유했습니다. 비서구 사회에서는 지금도 주술사 내지 무당의 우주론이 작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치유의 힘'은 어디서 올까요?
바로 과학에 대한 믿음입니다.
많은 심리치료 학파가 발표를 시작할 때 해부학 도표나 쥐 실험 결과를 먼저 제시하곤 합니다. 정작 본론인 치료 기법과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약한데도 말이죠.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마치 주술사가 영험한 상징물을 들고 나타나듯, "나는 과학적 권위자다"라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내담자의 신뢰를 얻으려는 일종의 '상징적 의례'입니다. 이는 니체식으로 ‘객관성의 우상’이라 불릴만한 것입니다. 우리를 낫게 하는 것은 객관적 진리 그 자체라기보다 그 의례를 통해 형성되는 신뢰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의식(Ritual)이 만들어주는 ‘체면 있는 회복’
최면, 명상, 혹은 특정한 질문 기법들 … 상담실의 복잡한 절차들은 단순한 기술이 아닙니다. 제롬 프랭크는 이 정교한 의식들이 환자에게 “체면을 지키며 고통에서 빠져나올 명분”을 만들어준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환자는 스스로 증상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나아버리기에는 어딘가 민망하죠. 이때 상담사(혹은 심리치료사)―고액의 상담료를 결제하지 않고서는 만나기도 쉽지 않은―의 정교하고 장엄해 보이는 치료 절차는 퇴로를 열어줍니다.
‘이만한 개입을 받았으니 이제 나아도 괜찮다.’
의식이 화려할수록 내담자의 체면은 더 굳건하게 보호됩니다. 인간은 때로 '더 강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서사를 위해 화려한 무대 장치를 필요로 합니다.
절망을 비극적 영웅의 서사로 바꾸기
심리치료의 핵심은 극심한 사기 저하(Demoralization) 상태에 빠진 환자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예컨대 정신분석이나 실존주의 치료는 인간의 본성을 비관적으로 보지만, 역설적으로 그 전망을 영웅적인 서사로 전환합니다.
정신분석: “당신은 본능의 노예이지만, 진리(무의식 탐구)를 통해 스스로를 통제하는 이성적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 “삶은 원래 무의미하지만, 그 허무와 당당히 싸워 의미를 창조하는 영웅이 되십시오.”
결국 심리치료는 ‘당신은 근본적으로 망가진 존재가 아니라 단지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이라는 이야기를 내담자의 가슴에 심어주는 작업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치유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프랭크는 심리치료를 폄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담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기계적 수리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깊은 연결이자 서사의 재구성 작업임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상담실은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하는 수리 센터가 아니라, 이를테면 자기 삶의 비극을 다른 이야기로 다시 써보는 '철학적 연극 무대'에 가깝다는 것이죠. 어쩌면 치유의 열쇠는 도표나 처방전보다 먼저, 자기 삶을 다른 이야기로 다시 써볼 용기 속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독자에게 돌아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통에 어떤 이름을 붙이고, 어떤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가시겠습니까?
[저는 프랭크의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서양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솔직한 사람들이 많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국내에서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책이기에, 상담이나 심리치료에 관심 있는 브런치 작가분들에게 조심스럽게 권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