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민방위다.
민방위 말년.
마지막 연차라 그런지, 코로나 때문인지
한 시간 교육만 받으면 나의 민방위 의무는 끝이다.
틀어놓기만 해도 되는 교육임에도
그저 귀찮다는 이유로 질질 끌어왔다.
한 번씩 교육 독촉 문자를 보며
되지도 않은 짜증을 부리며 이 교육을 끝내지 못했다.
오늘도 아침 일찍 '띠릭' 문자가 울린다.
발신자가 "민방위"다.
이놈의 독촉 문자는 지긋지긋하다.
얘네들은 할 일이 없나, 이른 아침부터 문자질은...
가뿐히 무시하고 열심히 업무에 열중했다.
사무실 분위기가 사뭇 어수선하다.
민방위 얘기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팀장이 다가와 물어본다.
"부푼돛, 너도 아직 민방위 아니냐? 넌 백신 안 맞아?"
백신? 뭐지?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단톡에서 코로나 백신 얘기로 떠들썩하던데.
"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런 둔한 놈, 이럴 때 예약해서 백신 맞아야지!"
알고 보니 예비군과 민방위 대원들을 대상으로
코로나 백신 접종을 예약했던 것이었다.
아불싸, 좀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맞을 수 있었을 텐데.
못내 아쉽다.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
그렇게 생각하니 아쉬움의 크기는 계속 커졌다.
민방위가 마지막으로 준 선물을 받지 못했다니!
산타할아버지한테 크리스마스 선물을 못 받은 막내딸 마냥
상실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주위 젊은 예비군들의 예약 소식이 마냥 부러웠다.
그렇게 오후 업무에 한창 집중하던 중
"띠릭"문자가 울린다.
평소 문자를 확인하지는 않지만
예감이 예사롭지 않다.
어? 민방위다!!!
오늘 아침만 해도 지긋지긋하다고
온갖 저주의 말들을 다 퍼부었는데 이렇게 반가울 수가.
얼른 문자를 확인했다.
추가 예약 문자였다.
10만 명을 추가로 예약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혹여나 마감이 될까 봐 빛의 속도로 예약을 완료했다.
예약을 끝내고
주위의 젊은 동료들에게도 오지랖을 부렸다.
추가 예약을 하니 빨리 서두르라고.
좀 있으면 마감될 거라고.
떠난 막차를 겨우겨우 잡아탄 자의 여유와 안도감이다.
이런 여유와 안도감은 단순히 백신 예약 때문이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국으로 향하는 기차는 아니지만
예비군과 민방위만 탈 수 있는
젊음으로 향하는 기차는 타고 싶었다.
그들과 젊음을 공유하기 위해서?
남자로서 아직 쓸 만하다고 나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결국은 별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생각하니
나 자신이 애처롭게도 느껴졌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지난 젊음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러고 보니 8살짜리 둘째 딸도
자신이 아기였을 때가 그립다 하더라.
어찌 보면 지난날의 회상은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신비한 무엇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어린아이마저도
아련한 옛 기억의 옷자락을 놓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의 나도 지금을 회상하며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젊음이 있었다고 되뇌듯이.
확실한 사실은
지금이 나의 시절 중 가장 젊은 순간이라는 점이다.
내 생애 가장 젊은 나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다 시작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자.
"카르페디엠"
지금, 여기를 사랑하라 하지 않았던가.
근데 젊은것들의 하얗고 매끈한 피부,
새까맣고 풍성한 머리숱은 포기하지 못할 거 같다.
내년이면 민방위 독촉 문자도 못 받게 되겠지.
더 이상 민방위가 주는 반가운 선물은 받지 못하겠지.
이렇게 민방위의 끝을 잡고 놓지 못하는 것이
나의 솔직한 감정 이리라.
갑자기 솔리드의 "이 밤의 끝을 잡고"를 들으며
옛 젊음을 만끽하고 싶다.
혹시 솔리드를 알고 공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대를 아재로 인정하리라.
이렇게 어느새 나도 아재가 되고 나이가 들어간다.
이 밤의 끝을 잡고, 민방위의 끝을 잡기 위해
민방위 교육은 미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능한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