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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Feb 14. 2021

플라톤 <국가> 제1권 정리: 올바름에 대한 견해들

제 1권 올바름에 대한 견해들

Key words: #생활습관#생활방식#습관이답이다#아리스토텔레스#행복지수#부와행복의관계#올바름#올바름이란무엇인가#정의#정의란무엇인가#정의관#비용편익#글라우콘#소크라테스#케팔로스#폴레마르코스#트라시마코스#트라시마쿠스#강자의이익#아레테#탁월성#에르곤#영혼의탁월성#영혼에관하여#윤리학#정치철학#이기적유전자#무임승차문제


0.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플라톤의 근본적 물음

  흔히 문학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로는 셰익스피어는 현대 문학 플롯의 대부분을 이미 선취했다고 한다. 일단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의 플롯을 셰익스피어에게서 빌려왔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 주장이 어느 정도 입증된다. 마찬가지로 플라톤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철학에서 주요하게 논의된 모든 주제들을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 선취했다고 소개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남긴 서적들을 들추어보면 언어철학, 형이상학, 심리철학, 정신분석학, 종교학, 인식론, 윤리학, 정치철학, 교육학, 미학 등 건드리지 않은 주제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이들이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들 중 하나로 꼽는 화이트헤드도 "서양 철학 2,000년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라는 명언을 괜히 남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그 옛날 고대 그리스 시대에 왜 그렇게까지 많은 주제들을 다루며 학문에 매진했을까?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잘 산다는 것'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의 의도를 그렇게 파악했다. 그는 삶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철학자였다. 인간이 태어나고나서 죽기까지 소중하게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철저하게 고민하고 탐구한 것이다. 특히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중우 정치로 인해서 참담하게 희생당한 모습을 보았기에 '인생의 의미(meaning in life)'에 대한 의문은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삶이란 무얼까? 인생이란 무얼까? 올바른 정치란 무얼까? 도무지 세계는 어떻게 생겨먹은 것일까?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그러므로 그가 다루었던 온갖 주제들은 결국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주제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


 마침 플라톤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 <국가>의 부제(subtitle)도 (비록 훗날 사람들이 붙인 것이지만) "올바름에 관하여(正義論)"이다. 책의 제목은 <국가>지만 결국엔 '잘 산다는 것'에 대해서 다룬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에서도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정치철학, 심리철학, 교육학, 미학 등 수없이 다양한 분야의 주제를 다룬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엔 '잘 산다는 것'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리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일단 플라톤이 살았던 고대 그리스 시대는 공동체로부터 홀로 떨어져있는 '개인(individual)'이라는 개념은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로 공동체 중심적이었던 환경이었다. 그 당시에는 공동체의 안녕과 정의는 사람들이 '잘 살아가는 것'과 지금보다 더욱 밀착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산다는 것'에 대한 탐구를 할 때 '국가(politeia)'에 대한 탐구는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그의 저서 <국가>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부터 차근차근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도록 하자. 


https://youtu.be/wJobTsRZwrU ([GMC강연] 나이가 들면 얻게 되는 선물 _ 김대식 뇌과학)


1. 소크라테스 선생, 중요한 건 나이 듦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방식입니다.

"'소포클레스 선생, 성적인 쾌락과 관련해서는 어떠신가요? 선생께서는 아직도 여인과 관계를 가질 수 있으신가요?'라고 그 사람이 물었죠. 그러자 그분께서는 '쉿, 이 사람아! 그것에서 벗어났다는 게 정말 더할 수 없이 기쁜 일일세. 흡사 광포한 어떤 주인한테서 도망쳐 나온 것만 같거든'라고 대답하시더군요. (...) 노년에 이르러서야 그와 같은 것들에서도 큰 평화와 자유가 완연히 생기게 되니 말입니다. 갖가지의 욕망이 뻗치기를 그만두고 숙어지게 되는 그때에야 소포클레스께서 말씀하신 상태가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니, 그건 하고많은 광적인 주인들한테서 풀려나는 것이죠." (329c)


"하지만, 이런 것들과 관련해서도, 그리고 친척들과 연관된 일들과 관련해서도 한 가지의 탓(aitia)이 있을 뿐이니, 소크라테스 선생, 그건 노령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방식(tropos)입니다. 그야 사람이 절도 있고 쉬 만족할 경우에는, 노령일지라도 적당히 지칠 정도일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소크라테스 선생, 만약에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런 사람한테는 노령도 젊음도 다 견디기에 힘들 겁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네." (329d)


"말하자면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가난하고서는 노령을 썩 수월하게 견디어 내지 못하겠지만,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부유하다고 해서 결코 쉬 자족하게는 되지 못할 것이니 말입니다." (330a)


 플라톤의 <국가> 제1권의 주제는 크게 봐서 '올바름에 대한 견해들(doxa)'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탁월한 작가 플라톤은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초반부터 흥미로운 밑밥을 깐다.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라는 노옹(이하 노옹)의 집에 초대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에게 노년의 삶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그러자 노옹은 그런대로 노년을 잘 지내고 있다며 결국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늙은 나이가 아니라, 생활 습관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노옹은 자신과 연배가 엇비슷한 몇몇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있어서 온갖 불행의 탓이 노령이라며 나이 탓을 하는 꼴이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일단 노옹 자신을 포함해서 그동안 그가 만나온 다른 사람들은 노령을 불행의 탓이라고 느끼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생활 방식(tropos), 즉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다.


 마찬가지로 노옹은 재산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해서도 현명하게 답변한다. 소크라테스는 노옹이 그런대로 노년을 수월하게 견디어 내는 것은 생활 방식 때문이 아니라 많은 재산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대중들이 생각할 것 같다고 물었다. 그러자 노옹은 생활 방식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재차 강조한다. 물론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어도 가난하다고 하면 노년을 썩 괜찮게 버티지는 못하리라는 이야기도 해둔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일정량의 재산은 그런대로 노년을 수월하게 견디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행복하고도 수월한 노년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노옹은 다음과 같이 현명하게 표현했다. "말하자면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가난하고서는 노령을 썩 수월하게 견디어 내지 못하겠지만,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부유하다고 해서 결코 쉬 자족하게는 되지 못할 것이니 말입니다."


 플라톤이 <국가> 제1권을 이와 같은 노옹의 현명한 답변으로 시작한 까닭은 무엇일까? '올바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는 질문과 연관이 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옹과 같이 비교적 불리한 조건('노령' 등)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노년을 그런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비추어준다. 중요한 것은 나이도 아니고, 가지고 있는 재산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가? 노옹이 말했듯이 (올바른) 생활 방식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올바른 생활 방식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탐구의 여정을 이번 제1권에서 그려나간다.


https://youtu.be/EzIoBWHLg80 ([위대한 유산] 플라톤 "국가" 1강 (박성우 교수))


2.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케팔로스의 정의, 폴레마르코스의 정의, 트라시마코스의 정의

 자, 이제 '올바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일종의 배틀이 오간다. 이 배틀에 참여하는 이들은 크게 봐서 노옹 케팔로스, 폴레마르코스, 트라시마코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은 대놓고 논쟁을 한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만의 '올바름'을 두고 은근한 기싸움이 오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결론은 이미 너무나 잘 알려졌고 뻔하다. 각각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옹 케팔로스의 올바름은 '정직함과 남한테 갚을 것을 무조건 갚는 것'이다. 폴레마르코스의 올바름은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주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의 올바름은 '더 강한 자의 편익'이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모두 비판함으로써 그동안 사람들이 올바름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는 아포리아에 이르게 한다. 역시나 탁월한 작가 플라톤은 그동안의 선행 연구를 검토하고 비판함으로써 앞으로 이야기할 자신의 생각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철학에서 결론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논증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여기에서 모든 논증을 다 다루기에는 글이 장황해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흥미롭거나 인상적이었던 논증들 위주로 다루기로 하겠다. 일단 335b부터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의 올바름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 논증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여기서 폴레마르코스는 "실제로 좋은 친구는 잘 되게 해주되 실제로 나쁜 적은 해롭도록 해주는 것이 올바른 것"(335a)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결론적으로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올바른 이의 기능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인간 즉 올바르지 못한 자의 기능"(335d)이라고 비판한다. 그에 대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P1. 사람이 해를 입으면 인간적 훌륭함이 해를 입는다. (335b)

P2. 그런데 인간적 훌륭함은 올바름이다. (335c)

C1. 따라서 해를 입은 사람들은 그들의 올바름도 해를 입게 된다. (그러니 이전보다 더욱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이 된다.) (335c)


P3. 해를 입히는 것은 훌륭한 사람의 기능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사람의 기능이다. (335d)

P4. 그런데 올바른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335d)

C2.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올바른 사람의 기능이 아니다. (335d)


 이렇게 어느 정도 논증을 그럴 듯하게 재구성을 한 것 같으니 이제는 그 논증에 대한 평가를 하도록 하자. 우선 C1은 전제들로부터 타당하게 추론된 결론이다. 즉, 전제가 참이면서 동시에 결론이 거짓인 경우가 상상불가능한 논증을 통해 추론된 결론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C1은 건전하게 추론되었는가? 즉, 결론이 타당하게 추론되었으면서 동시에 전제들이 모두 참인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일단 P1의 맥락에서 '해를 입는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금전적 손해를 입는다는 것인가, 아니면 육체적 고통을 겪음으로써 손해를 입는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상실감 등과 같이 다분히 심리적인 고통을 겪음으로써 손해를 입는다는 것인가? 게다가 전건의 '해를 입으면'과 후건의 '해를 입는다'이 같은 의미를 뜻하는지도 불명료하다. 후건의 '해를 입는다'는 해를 입은 누군가가 올바름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조금이나마 잃게 된다는 뜻일까? 그리스어 원문을 읽을 수 있는 실력이 아니라서 심히 안타깝다.


 일단 대강 해석해며 넘어가도록 하겠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떠한 종류의 해를 입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올바름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조금이나마 잃게 되는 귀결로 가지는 않을 것 같다. 누군가가 도박에 함부로 손을 대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크게 손해를 봤기 때문에 올바름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 오히려 형성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경우는 진정한 손해를 본 것이 아니라고 재반박할까? 잘 모르겠다. P2는 받아들일만한 것 같다. 인간적 훌륭함은 올바름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강이라도 생각해본 결과 C1는 건전하게 추론된 결론이 아닌 듯하다.


 이제 C2를 결론으로 낸 논증을 살펴보도록 하자. C2도 마찬가지로 타당하게 추론된 결론이다. 그렇다면 C2는 건전하게 추론된 결론일까? 일단 P4는 받아들일만하다. 올바른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 맞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P3는 그리 설득력이 있어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입게 하는 경우를 살면서 한번쯤은 겪으리라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집단과 집단 사이의 관계에서 자주 벌어지는 상황이다. 혹시 내가 덕이 너무나 모자라서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지고한 경지의 훌륭한 사람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것이 딱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C2가 건전하게 추론된 결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폴레마르코스가 주장한 올바름을 비판하기 위해 꺼낸 논증은 그리 설득력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출처: https://pixabay.com/illustrations/plato-philosopher-ancient-3069619/

3. 올바르지 못한 나라가 다른 많은 나라들을 복속하게 할 수 있을만큼 강해질 수 있는가?

 다음으로 살펴볼 논증도 꽤나 흥미롭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더 강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나라가 다른 많은 나라들을 복속하게 할 수 있을만큼 강해질 수는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러한 논의는 현대 진화생물학이나 경제학에서도 '무임승차자 문제(free-rider problem)'로 계승되기 때문에 흥미롭게 살펴볼만하다. 이 대목에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대한 논거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P4. 올바르지 못함의 기능은 서로를 미워하고 갈등이 생기게 하지만, 올바름은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준다. (351d)

P5. 올바르지 못함이 집단에 깃들게 되면 그것은 서로를 미워하고 갈등이 생기게 하고 한 마음이 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무 것도 해낼 수가 없도록 만든다. 그리고 올바르지 못한 집단은 올바른 사람들에 대해서 적이 된다. (351d-e)

P6. 올바르지 못함이 한 개인 안에 깃들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갈등이 생기게 하고 한 마음이 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무 것도 해낼 수가 없도록 만든다. 그리고 올바르지 못한 개인들은 올바른 사람들에 대해서 적이 된다. (352a)

C3. 따라서 철저하게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해낼 수가 없다. (352c)

C4. 그러므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해낸 사람들은 그나마 어떤 형태의 올바름이 깃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은 어중간한 상태의 올바르지 못한 자들이다. (352c)


 일단 C3은 '올바르지 못함이 집단에 깃들거나 한 개인 안에 깃들게 된다'라는 숨은 전제와 P5, P6을 가지고 이러나저러나(constructive dilemma) 추론을 한다면 타당하게 도출되는 중간결론이다. 그리고 P4를 개인과 집단 각각에 적용하면 P5, P6을 적절하게 추론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각각의 전제는 참인가? 적어도 '올바르지 못함'을 '잘 살고 있지 못함' 정도로 생각해본다면 각각의 전제들은 어느 정도 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잘 살아가고 있으려면 서로 합심하고 우애가 가득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잘 살아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집단이 잘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서로 반목하게 되고 미워하게 되며 합심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이 잘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나 자신과 내적 갈등을 일으켜 한 마음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에 대해서 내적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플라톤의 지적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무의식 구조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결국 집단과 개인 두 경우 모두 잘 살아가고 있지 못하게 되면 합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해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C4에서 말한 것처럼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해낸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어떤 형태의 올바름이 깃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해내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라도 해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으로 미루어 볼 때, 소크라테스는 올바르지 못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복속하게 할 수 있을만큼 강해질 수는 없다고 주장하려는 듯하다. 아무래도 철저하게 올바르지 못한 나라는 결코 뭉치지 못해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https://blog.naver.com/philia1223/221541593885


 그런데 정말로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라면, 그 생각은 적절한 추론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C4의 주장을 기반으로 생각해 볼 때, 어떤 나라에 어중간한 상태의 올바르지 못함이 깃들어 있다면 그 나라는 어느 정도 수준의 올바르지 못한 짓들까지는 도모하고 행동으로 이행할 수 있다. 이들은 그나마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내집단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외집단을 배척하거나 정복하는 등 올바르지 못한 짓들까지 저지를 여력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철저하게 올바르지 못한 나라라면 구성원 각각이 모두 무임승차를 하려 하기 때문에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금방 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적당히 어중간한 수준으로 올바르지 못한 나라라면 다른 나라를 복속하게 할 수 있을만큼 강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적당히 어중간한 수준으로 올바르지 못한 나라'라는 것의 허용치는 어디까지일까? 그 나라의 개별적인 구성원들이 무임승차를 하려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면서도 아직까지는 국가라는 집합체가 건재하게 버틸 수 있는 게임이론적인 균형점까지다. 바로 그 균형점을 넘어설 정도로 개별적인 구성원들이 무임승차를 한다면 해당 국가는 얼마 가지 않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지속적으로 존속할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질서 유지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 제 2장에서 언급한 '안정자 생존(survival of the stable)'이라는 법칙이 적용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혼이 비정상이면 잘못 다스린다. 따라서 박근혜는... 읍읍

4. 올바른 사람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하면서 이득을 본다

 마지막으로 이번 제1권의 가장 핵심적인 논증 중 하나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논증에 대해 논의해보도록 하겠다. 올바른 사람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하며 이득을 본다고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논증이다. (354a) 이것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서라도 꼭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내용일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잘 산다는 것'이 곧 '올바르게 산다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올바르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를 강조하고자 올바른 사람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하며 이득을 본다는 논증을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서 펼친다. 그를 뒷받침하는 논증은 다음과 같다.


df. 어떠한 것의 기능(ergon)은 그것만이 해낼 수 있거나 또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그것이 가장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이다. (353a)

P7. 어떠한 것이 훌륭한 상태에서는 그 기능이 훌륭하게 수행되지만, 나쁜 상태에서는 그 기능이 나쁘게 수행된다. (353c)

P8. 혼에는 혼만이 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그 기능은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 심사 숙고하는 것 등이다. '사는 것'도 혼의 기능이다. (353d)

C5. 혼의 상태가 나쁘면 잘못 다스리고, 혼의 상태가 좋으면 잘 다스리게 될 것이다. (353e)

P9. 올바름은 혼의 훌륭한 상태이지만, 올바르지 못함은 혼의 나쁜 상태다. (353e)

C6. 따라서 올바른 사람은 훌륭하게 살게 되겠지만,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잘못 살게 될 것이다. (353e)

P10. 훌륭하게 잘 사는 사람은 복받고 행복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반대일 것이다. (354a)

C7. 그러므로 올바른 사람은 행복하되,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 (354a)

P11. 그런데 행복한 것은 이득이 되나, 불행하다는 것은 이득이 되지 않는다. (354a)

C9. 올바름은 올바르지 못함보다 이득이다. (올바른 사람은 이득이 되나,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이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354a)


 이제 조금은 길어보일 수도 있는 위 논증을 차근차근 평가해보도록 하자. 먼저 각각의 논증에 대한 타당성을 평가해보도록 하자. 우리는 P7, P8을 통해서 C5이라는 중간결론을 정당하게 도출해낼 수 있다. 그리고 C5의 '잘못 다스리고'와 '잘 다스리게 될 것'을 각각 삶에 대해서는 '훌륭하게 살게 되는 것'과 '잘못 살게 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C5와 P9를 통해서 C6이라는 중간결론을 정당하게 도출할 수 있다. 또한 C6, P10을 통해서 C7이라는 중간결론을 정당하게 도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C7과 P11을 통해서 C9라는 최종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결국엔 위 논증은 '올바름은 올바르지 못함보다 이득이다'라는 최종결론을 연역적으로 정당하게 도출하는 타당한 논증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전제들은 참인가? 일단 기능(ergon)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정의는 받아들일만하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기능이라고 하면 다른 무언가와 구별되어서 그것이 가장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P7, P8, P9, P11도 상식적으로 받아들일만하다. P8의 '혼(psyche)'이 인간의 혼을 가리킨다면 보살피는 것, 다스리는 것, 심사숙고하는 것 등을 혼의 기능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영혼에 관하여>에서 식물, 짐승, 인간들도 각각의 수준에 해당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도 그러한 방식으로 모든 생명에 영혼이 있다고 바라봤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가장 관건이 되면서도 논란이 될 수 있는 전제는 P10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훌륭하게 잘 사는 사람은 복받고 행복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반대일 것이다'(354a)라는 주장이다. 적어도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소크라테스가 보충 설명을 하는 구절은 제1권에 따로 나오거나 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논변에 대해서 나름 까다롭게 구는 트라시마코스마저도 이 지점에서는 별다른 비판이 없이 그냥 넘어가고 만다. 과연 <국가>의 다른 권들이나 플라톤의 다른 저작에서는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이 나올까? 차근차근 그의 저작들을 읽어내려가면서 기대해보도록 하자. 일단 제2권으로 넘어가면서 올바름에 대한 그의 여정을 따라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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