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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Feb 16. 2021

플라톤 <국가> 제2권 정리: 국가의 기원과 구조

제 2권 국가의 기원과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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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플라톤의 밀당: 주인공 버프빨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은 소크라테스

 솔직히 말해서 1권 마지막 장면에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대한 만족스러운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와의 논쟁에서 주인공 버프빨로 아슬아슬하게 이겼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분명히 트라시마코스의 입장에서는 소크라테스가 펼쳤던 논증의 허점을 파고들고 공격할 여지야 충분했지만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냥 넘어가고야 말았다. 그렇게나 소크라테스의 논변에 대해서 까다롭게 굴었던 트라시마코스가 말이다! 숨막히게 대화편을 지켜보던 독자들도 1권을 덮으면서 김빠지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도무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당시에 탁월한 작가 플라톤은 올바름에 대한 정의를 두고 독자들과 일종의 밀당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2,000년이 넘는 시대를 초월한 지금의 독자들에게까지 말이다. 다소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독자들에게 올바름에 대한 개관을 소개하고 흥미를 돋게 하는 정도의 목적으로 제 1권을 썼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아니, 그래서 올바르게 살면 정말 행복해진다는 거야?'라면서 자연스레 다음 권을 펼쳐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의 설명은 근거가 미약한 개인적인 추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국가>라는 책의 구조를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추정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단 1권은 플라톤 초기 사상의 끝자락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문체도 그렇고, 올바름이 논의되거나 논박되는 방식도 그렇고, 결국엔 그에 대한 정의가 실패로 끝난다는 점에서 초기 대화편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반면에 2권부터 10권까지는 플라톤의 중기 사상에서도 끝자락에 쓰인 자료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훗날 1권과 나머지 권들이 결합되면서 1권에 어느 정도 편집과 수정이 가해졌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1 그러므로 여기에 더하여 플라톤이 1권을 독자들과의 밀당을 위한 용도로 활용했다고 재미삼아 이야기해보는 것도 그렇게까지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독자와 밀당을 하는 '철학 밀당남' 플라톤

1. 착하게 살면 바보가 된다?: 글라우콘의 기습공격

 아무튼 1권에서 소크라테스는 주인공 버프빨로 논쟁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나 싶었더니, 2권에서 다시금 위기가 찾아온다. 이번에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기도 한 글라우콘의 기습공격이다. 역시나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는 것인가! 글라우콘은 트라시마코스의 포기를 쉽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되살려 냄으로써 소크라테스에게 올바름에 대한 더욱 강한 주장을 하도록 유도해내려 한다. 그러면서 좋은 것들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그 자체로 좋은 것,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 그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 말이다. 그리고 이들중에서 올바름은 어느 것에 속하냐고 소크라테스에게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올바름은 마지막 영역에 속한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이에 대해서 글라우콘은 올바름은 그 자체로는 기피할 성질의 것이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보수나 평판 따위의 결과 때문에 사람들이 좋게 생각할 뿐이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심지어 올바른 사람보다도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누리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이는 그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일 뿐 자신의 생각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 선생님의 강력한 반론을 유도하려 할 뿐이라는 점도 덧붙인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추정해보건대, 툭 까놓고 말해서 '올바르게 살아서 뭐가 그리 좋냐' 이런 이야기를 소크라테스에게 물어보려는 심정이 가득했을 것이다. 올바름에 대한 신념을 온몸으로 지켜내며 세상을 살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호구가 되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은 플라톤이 살아간 시대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정말로 착하게 살면 복을 받을까? 이와 관련해서 히브리 성서의 <시편> 1편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1-2)


 위 구절을 지어내고 부른 이는 분명히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는 생각을 명확하게 품은 듯하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여호와의 율법'이 상징하는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삶은 분명히 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갈수록 나쁜 놈들이 깽판쳐가며 떵떵거리는 세상이 되어가는 듯하다. 똑같은 <시편>에서도 11편을 읽어보면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동안 사람들이 옳다고 믿어왔던 가치와 세계관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듯한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더욱 극적인 상황으로 풀어낸 이야기가 <욥기>라고 생각한다. <욥기>에 등장하는 욥은 무고할 뿐만 아니라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욥 1:3)이라는 칭호까지 받을 정도로 올바름에 가까운 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이 너무나 끔찍한 고난들을 겪게 된다.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는 말이 진실로 맞다면 욥과 같은 사례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 소크라테스의 꼼수: 개인-국가의 유추


"이를테면, 누군가가 그다지 시력이 좋지 못한 사람들더러 작은 글씨들을 먼 거리에서 읽도록 지시했을 경우에, 어떤 사람이 이런 생각을, 즉 똑같은 글씨들이 어디엔가 더 큰 곳에 더 큰 글씨로 적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먼저 이것들을 읽고 난 다음에, 한결 작은 글씨들이 이것들과 혹시 같은 것들인지를 살피게 된다면, 이는 천행으로 여겨질 거라고 나는 생각하네." (368d)


"자네한테 내 말해 줌세. 올바름(올바른 상태, 정의: dikaiosynē)엔 한 사람의 것도 있지만, 나라(polis) 전체의 것도 있다고 아마도 우리는 말할 것 같은데?" (368e)


"그러니까 어쩌면 올바름은 한결 큰 것에 있어서 더 큰 규모로 있을 것이며, 또 알아내기도 더 쉬울 걸세. 자네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먼저 나라들에 있어서 올바름이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도록 하세나. 그런 다음에 한결 작은 형태의 것에 있어서 한결 큰 것과의 유사성을 검토해 보면서, 역시 개개인에 있어서의 올바름을 마찬가지로 검토해 보도록 하세나." (368e)


 천하의 소크라테스. 글라우콘의 기습 공격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것은 그 아무리 위대한 스승 소크라테스라 할지라도 선뜻 체계적인 답변을 내놓기가 어려운 질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그 순간 한 가지 적당한 꼼수가 소크라테스의 뇌리를 스쳐갔다.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벌겠다는 꼼수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지금 주제와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대해서는 국가에 대한 것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나 큰 규모의 관점에서 이를 찾는 편이 더욱 쉬우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마치 똑같은 내용을 큰 글씨로 편하게 읽고자 하려는 노력과 비슷하지 않겠냐는 유비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먼저 국가의 올바름에 대해 글라우콘과 논의하기 시작한다.


 일단 소크라테스는 '이론상으로 수립되고 있는 한 나라'를 관찰해보기로 한다. 즉, 이성적인 추론을 통해서 국가의 기원부터 시작해 '최소 한도의 나라', '작은 나라' 등을 거쳐서 '호사스런 나라'까지 논의를 확장해간다. 그는 "나라가 생기는 것은 우리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369b)이라며 국가의 기원을 설명한다. "나라를 수립시키는 것은 우리의 '필요'(chreia)"(369c)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필요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의·식·주의 마련을 위한 나라를 '최소 한도의 나라'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런데 더욱 효율적인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시민이 필요하다. 이렇게 모인 시민들은 '성향에 따라' 한 사람이 한 가지 기술에 종사하도록 해야 한다. 한 사람이 농사도 짓고, 집도 짓고, 옷을 만들고, 신발을 만들다면 정말 비효율적일 것이다. "우리 각자는 서로가 그다지 닮지를 않았고, 각기 성향에 있어서 서로가 다르게 태어"(370a)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가 마련한 재화를 원하는 이들끼리 서로 교환하도록 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작은 나라'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제 그 '작은 나라'는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할 정도로 크게 된다. "나라를 수입품이 전혀 필요하지 않을 그런 곳에다가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370e)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무역의 시작이다. 이전보다 시장은 훨씬 커져서 사람들로 북적북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확장된 시장에서 생산직을 하는 사람들이 직접 무역을 하거나 시장에서 거래를 할 것인가? 자신의 일은 내팽개친 상태로 그저 시장에 주저앉아 있어야만 하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등장한 직업이 소매상이다. 이들은 "시장에서 자리를 잡고서 사고 파는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371d)이다. 이로써 무역상과 소매상을 포함한 다양한 직업군들도 발생하게 된다. 지금까지 언급한 정치경제학적인 기술을 살펴보면 경제학의 아버지인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시민들의 필요로 인해서 시장 경제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그렇다. 분명히 아담 스미스도 당대에도 마찬가지로 고전이었던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봤음이 틀림없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호사스런 나라'의 경우까지 넘어가게 된다. 여기에는 요리와 향유 및 향료, 기녀와 생과자, 회화와 자수, 황금과 상아, 예술가들이 갖추어진다. 이렇게 되면 영토가 충분하기는커녕 작아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국제 관계가 어떻게 돌아갈까? "우리가 목축하고 경작하기에 넉넉한 땅을 가지려 할 경우에는, 우리로서는 이웃 나라 사람들의 땅을 일부분 떼어내야만 되겠고, 다시 그들은 그들대로, 만약에 그들 역시 필요 불가결한 것들의 한도를 벗어나, 재화의 끝없는 소유에 자신들을 내맡겨 버리게 될 때는, 역시 우리 땅을 떼어 가져야만"(373e)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전쟁의 기원"이다.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전쟁이 자본주의의 끝없는 확장으로 인해 생겨났다는 점에서 볼 때 이는 상당히 훌륭한 통찰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국가가 커지고 전쟁이 벌어지게 되니까 군대의 결성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전쟁과 관련된 겨룸은 농사나 집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술적인 것이다. 아까도 언급했다시피 이러한 기술은 한 사람당 하나만 종사해야 한다. 특히 전쟁에 관한 기술이야말로 이러한 원칙이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전쟁에서 승리하느냐 마느냐로 인해서 국가의 존립이 결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호자들(phylakes)의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수호에 어떤 사람들이 그리고 어떠한 성향들이 적합한지를 가려내는" 논의를 하려 한다.


3. 수호자는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 적합한가?: 교육의 중요성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이 "친근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온순해야 되겠지만, 적들에 대해서는 거칠어야만"(375c) 한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친근한 사람들에게도 거칠게 대한다면 금방 질서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순하면서도 동시에 대담한 기질"(375c)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친구와 적을 올바르게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은 "천성으로 지혜를 사랑하며 배움을 좋아하는 이어야만"(376c) 할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수호자로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에 대한 교육은 어때야 할까? 몸(sōma)과 혼(psychē)을 위한 교육이 둘 다 중요하다. 그리고 "몸을 위한 교육으로는 체육이 있겠으며, 혼을 위한 교육으로는 시가가 있겠"(376e)다. 소크라테스는 그중에서도 시가에 의한 교육을 먼저 시작함으로써 혼을 더욱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시가에 포함된 이야기들은 올바르지 못한 자들이 이득을 보는 이야기여서는 결코 안 된다고 말한다. "설령 그게 진실이라 할지라도 철없고 어린 사람들을 상대로 그처럼 경솔하게 들려 줄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것이 상책"(375a)일 것이라고 덧붙이며 말이다. 오히려 교육에서 들려줄 이야기들은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과 같이 올바른 사람들이 결국엔 이득을 보는 이야기들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현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예술에 대한 규제는 너무나 보수적인 노인네의 주장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현대의 관점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측면이 있긴 하다. 어떤 이야기가 뇌에 각인되고 누적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되고, 더 나아가서는 행복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애착이론, 대상관계이론, 발달심리학 등의 개략적인 연구 결과만 보더라도 여러모로 경험적인 검증을 거친 이야기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어린 시절 아이들에게 평화롭고 안정적인 기억들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분히 상식적인 이야기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세상이 나름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게 하는 양질의 이야기를 제공해주는 어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람들마다 어떤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삶도, 심지어는 내가 지각하는 것들마저도 정도에 따라서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덮어놓고 거짓말을 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도 세상이 살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는 세상이 실제로도 올바르고 안전하며 서로가 신뢰할 수 있는 따뜻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실제로도 올바르고 존경하며 따를만한 어른들이 사회에 가득해야 한다. 아무래도 지금 시대에 가장 큰 문제점 하나는 존경하고 따를만한 어른을 보기 힘들다는 사실이지 않을까?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지금 시대에 전국민 아이들의 놀이터로 여겨지는 유튜브에 대한 적절한 규제는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온갖 유해한 콘텐츠로 가득차 있는 유튜브는 아이들에게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자극적인 언행들을 일삼는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을 그대로 따라할 우려가 크다. 실제로도 이미 그들의 혐오표현, 욕설, 행동들을 답습한 아이들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러한 유튜버들이 추앙받으며 돈까지 많이 버는 경우들이 허다하기 때문에 아이들도 자연스레 그들을 따라하려는 것이다. 분명 이러한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노출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예술 전반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규제하려 했다기보다는, 비교적 판단력이 떨어지는 어린 사람들이 아무런 예술에 대해 무분별하게 노출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술 규제를 강조했으리라고 생각된다.


https://news.imaeil.com/Entertainments/2021020510115351333  ('故박지선 비하 논란' BJ철구 복귀…5분만에 별풍선 1천만원)

"문제가 뭔지 알어?
존경할 만한 기자가 없어
존경할 만한 앵커도 없어
존경할 만한 PD도 없어
그게 왜냐면
니네가 하는 말은 다 뻥이야 다 뻥이야 다 뻥"

- Jerry. K, <다 뻥이야>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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