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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Feb 15. 2021

<썸을 탄다는 것은 무엇인가?> 논문에 대한 감상

http://www.analyticphilosophy.kr/attach/p/41_JGLee.pdf (썸을 탄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조어 “썸타다”의 적용조건 분석)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8749121&language=ko_KR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너를 좋아하고
너도 나를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고
우린 서로 좋아하는데도 그 누구도 말을 안 해요"

신현희와김루트, <오빠야> 中


"나 오늘부터 너랑 썸을 한번 타볼 거야
나 매일매일 네게 전화도 할 거야
매운 거 못 먹는 나를 달래서라도
너랑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닐 거야"

볼빨간사춘기, <썸 탈꺼야> 中


 어딘가에서 소식을 듣기로 어떤 철학과 대학원의 이번 1학기 수업 주제가 "썸타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찰"이라고 한다. 그 교수님은 한국 사회의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많이 가지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진지하게 연구를 해온 성과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보다 한껏 젊은 시절에 이미 과학철학 분야에서 훌륭한 성과를 내신 바가 있고, 그 과정을 통해 더욱 다듬어진 날카로운 분석력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논의해주신다. 개인적으로 볼 때 그러한 점은 상당히 존경할만하다고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번에는 그 교수님께서 "썸"에 대한 주제로 대학원 수업을 진행한다고 소식을 들으니 순간적으로 내가 잘못 봤나 싶었다. 아니, 이런 주제를? 그저 교양 수업도 아니고 학부 수업도 아니고 대학원 수업에서? 그러면서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아무래도 그 교수님께서는 페미니즘 분야에 대해서 관심이 많기도 하고, 일상 언어 분석에 대한 논문들도 다량 투고하신 바가 있으니 이번 수업 주제 선택도 나름 개연성이 있다는 결론을 빠른 시간 내에 내리게 되었다. 과연 어떤 텍스트를 수업의 소재로 삼을 것이며, 현장의 분위기는 어떠할 지 궁금하다.


 그러다가 혹시나 해서 "썸타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찰"이라고 네이버에 검색을 해봤다. 그 키워드로는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저것 입력해보다가 "썸타는 것은 무엇인가 분석철학"이라고 검색해봤다. 그랬더니 분석철학 분야에서 명망있는 학술지 「철학적 분석」에 실린 "이정규. (2019). 썸을 탄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조어 “썸타다”의 적용조건 분석. 철학적분석, (41), 61-80."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이미 선행연구로 누군가 다른 사람이 논문을 쓴 바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아, 분석철학의 침투력이란!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교수님께서는 이 논문을 포함한 아티클들을 바탕으로 수업을 하고 연구를 하시려는 거겠지?


 그래서 한번 이 논문을 읽어보기로 했다. 결론과 그에 대한 추론 과정이 그리 어렵지도 않으면서도 비교적 짧은 논문이라서 금방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논문 초록에 나온 다음과 같은 각주가 참 재미났다.


"마지막으로 나의 강의를 수강하면서 여러 가지 참신한 생각들을 제안해 주었던 서울대 논리학 (2018년 2학기, 겨울학기, 2019년 1학기) 수강생들과 논리와 비판적 사고 (2019년 1학기) 수강생들에게 가장 큰 고마움을 표한다."


 아마도 논문 저자는 논리학 전공 강의와 교양 강의에서 해당 논문의 주제를 바탕으로 학생들과 토론을 한 적이 있는 모양이다. 논문의 사이사이마다 학생들로부터 받은 소중한 비판과 반박을 각주에 새긴 것들을 보더라도 썸에 대한 더 나은 분석을 위한 갑론을박이 적지 않았던 듯하다. 그 모습을 제멋대로 상상해보니까 왠지 모르게 재미난 상황도 떠오른다. 일례로 논문 저자는 논문의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썸에 대한 최종 분석을 내린 바가 있다.

이정규. (2019). 썸을 탄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조어 “썸타다”의 적용조건 분석. 철학적분석, (41), 75 中
(12) a와 b가 썸을 탄다 iff a가 b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고, b 역시 a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a는, b가 자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어떤 긍정적인 증거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증거들은 이를 확실하게 보장해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고, b 역시도 a에 대해 마찬가지이다. 또한 a가 파악한 b의 호감에 대한 증거는, b가 자신에 대한 증거를 a가 가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방식으로 표출된 증거이며, b가 파악한 a의 호감에 대한 증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a와 b는 이러한 증거를 같은 방식으로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a와 b 사이에는 사귀는 것을 명시화하는 적절한 언화 행위가 수행되지 않았거나, 수행되었던 경우에는 더 이상 효력을 가지지 않는다.

이정규. (2019). 썸을 탄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조어 “썸타다”의 적용조건 분석. 철학적분석, (41), 75 中


 '자, 그러므로 저는 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a와 b가 썸을 탄다는 것은 a가 b에게 이성적 호감을 가지고...'라며 말을 꺼내려 하는데 학생들 중에서 누군가가 입을 연다.


???: 교수님 그거 썸 아닌데요? 

 

 그러면서 그 학생은 썸이라는 것은 이렇게 길고 분석적으로 정의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역설한다. 그러고 나서 강의 교재를 찢어버리고 강의실 문을 박차고 나간다! 다른 학생들도 이에 대해 동의하는 듯 강의 교재를 전부 찢어버리고 강의실 문을 박차고 나간다. 왠지 모르게 <죽은 시인의 사회>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생각만 해도 오글거린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재미나기도 한 것이다. 원래 오글거리는 게 은근히 재미있기도 한 법이니까.

 물론 이건 전혀 말도 안 되는 개인적인 망상에 불과하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별의별 망상이 다 떠오른다. 그런데 실제로 이러한 언어 분석에 과도한 반감을 느끼고 쳐다보는 것조차 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적지 않게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온 몇몇 사람들의 경우와 주변에서 종종 들었던 이야기들에 따르면 이러한 추론은 그렇게 이상하지도 않을 것이다.


 혹시나 그들이 이러한 오해를 할까봐 그에 대비하기 위해 논문의 좋은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제안할 적용조건의 최종 형태가, 어떤 가능한 반례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분석이라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단어에 대한 완전무결한 정의를 제공하려는 작업은 수행 불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식론에서 <지식> 개념에 대한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라는 분석이 게티어(Gettier 1963)의 유명한 반례에도 불구하고. 지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다른 철학적 분야에서도, 다른 사정이 같다는 조건 하에 상당히 유용하게 쓰이는 분석임에는 틀림없듯이, “썸타다”에 대한 나의 분석도,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좀 더 잘 이해하고, 다른 관련 분야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정규. (2019). 썸을 탄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조어 “썸타다”의 적용조건 분석. 철학적분석, (41), 64 中


 저자가 말한 것처럼 "아마도 단어에 대한 완전무결한 정의를 제공하려는 작업은 수행 불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러한 작업이 무의미하다는 결과를 함축하진 않는다. 일단 인식론에서 지식에 대한 "정당화된 참인 믿음"과 같은 정의라거나, 형이상학에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수많은 대립 이론들이라거나, 윤리학에서의 끝이 보이지 않는 논쟁들 모두가 그저 무의미한 작업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실패했다고 여겨진 철학적 분석들은 적어도 더 나은 분석을 위한 초석과 원동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저자의 분석은 요즘 한국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을 나눈다는 것에 대하여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초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소 뜬금없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과학적 지식도 역시 이렇게 다소 부족할 수도 있는 토대로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체계적인 앎에 다가가게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과학철학자 장하석도 그의 강연이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전통적 토대주의에서 말하는 토대는 평평한 지구와 같은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실제로 건물을 지을 때 지구는 절대적으로 고정된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딱딱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식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지구는 절대적 기초가 될 수는 없지만, 그 표면에 건물을 지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절대적 기초가 없어도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EBS 인문학 특강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6강 '과학의 진보' 편을 참고하거나 동명의 책 6장을 참고하면 좋다.


https://youtu.be/oO8q3g9kDSg ([EBS 인문학특강]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6강 과학의 진보)


 이래저래 말이 길어졌지만 그냥 마음 놓고 편하게 수다나 떨고 싶어서,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시국이 여의치 않아서 이렇게 대신 글로 풀고 싶었던 것 같다. 이렇게 글을 쓰다가 우연히 검색을 했는데 정말 마침 또 그 교수님께서 3개월 전쯤에 관련 논문을 투고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목부터 참 흥미롭다. "썸타기와 어장관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니... 논문 도입부를 조금 살펴보니 이번에 내가 감상을 남긴 논문 저자 이정규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는 논문처럼 보인다.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상대방을 적절하게 비판해서 좋은 대안을 내놓을지 상당히 궁금하다. 조만간 언제 시간을 내어서 읽어봐야겠다.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0502917 (썸타기와 어장관리에 대한 철학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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