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거든 바람 불거든 넘어지지 말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고린도 전서 15:14-15)
2021년의 부활절도 여차저차 지나갔다. 매년 부활절마다 예수의 부활을 기념한답시고 달걀들을 잔뜩 나누어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생명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생명이 대량으로 희생되는 꼴을 보노라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올해에는 어떤 면에서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올해 부활절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서 길거리에서 나누어주는 대대적인 달걀 공세는 많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러한 동물의 희생이나 생태계의 파괴에 대해 딱히 심각성과 책임을 느끼지 않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작년부터 지금까지 쭉 그칠 새가 없어보이는 코로나 팬데믹 사태가 동물권을 포함한 생태계 파괴의 연장선상에 해당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1 생각이 사뭇 달라지지 않을까? 물론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글의 주제는 이에 대한 논쟁도 아니므로 이만 각설하도록 하자. 어쩌다보니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그래서, '부활(resurrection)'이란 무엇인가? 부활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매년 이렇게 다들 호들갑을 떠는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매년 이렇게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다들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그토록 대단한 호들갑의 기원은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 대해서 매우 강력한 어조로 얘기한다.2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헛것이라면 그와 동시에 바울이 믿고 또 전파하는 초대 교회의 신앙들까지 모두 헛것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바울의 생각이야말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싶은 생각이다. 예수가 무슨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에나 나올 법한 좀비(zombie)도 아니고 다시 태어나기는 무슨 수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겠는가? 바울의 이러한 생각은 뮈토스(mythos)와 로고스(logos)가 서로 뒤얽힌 방식의 이야기가 만연했던 고대 로마 시대의 순진한 믿음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지금 시대에 예수가 문자 그대로 육적인 부활을 했다고 믿는 전근대인들이 꽤 많은 것 같긴 하다.)
게다가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보면 바울을 포함한 초대 교회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밀어붙였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갈 수도 있다. 당시 고대 로마에 복속된 유대인들은 정치적·경제적·종교적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자유가 박탈되었을 정도로 치욕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말하기를 곧 있으면 종말이 찾아온댄다. 조만간 예수라는 자가 재림을 할 텐데, 그렇게 되면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당시 그들이 살고 있던 힘겨운 삶은 종말을 맞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재림한다는 근거는?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바울은 부활이라는 그럴듯한 구라를 통해서 당시에 고난받던 민중들에게 종말론을 설득력있게 전파한 것이다. 이제 이들은 조만간 찾아올 종말을 희망차게 기다리며 하루하루 경건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종말론적 회중(eschatological congression)"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론적 배경은 우리 민족으로서도 크게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다. 당장 가까운 일제 강점기 때만 하더라도 수많은 신흥 종교들이 성행하지 않았던가? 원래 시국이 흉흉할 때일수록 민중들 사이에서 온갖 종교들이 횡행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나라 전체가 빼앗긴 상황이라면 오죽했겠는가? 그 와중에 민중들 사이에서 나름의 지지를 얻어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몇몇 종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동학, 원불교, 증산도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들도 넓게 보자면 어느 정도 종말론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학과 그를 계승했다고 자처하는 증산도는 개벽(開闢)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고, 원불교는 지금까지의 음세계와 대비되는 양세계를 논하기도 했다. 다만 기독교의 종말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렇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해도 그것은 오직 역사적 지평에서 실현될 그 무엇일 뿐이다. 결코 현세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온전한 종말론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겠다.3
아무튼 이러한 사례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가 흉흉할 때 드물지 않게 존재했던 듯하다. 바울이 그토록 유치한 종말론을 내놓은 이유가 충분히 짐작될만하다. 거기에다가 부활 구라까지 합쳐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그런데 그 부활 구라라는 것마저도 당시에는 흔하디 흔한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내러티브에 불과하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이집트·근동지역 신화의 매우 보편적인 설화양식일 뿐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12월 25일 동지 무렵에,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났고, 결혼식에 물을 술로 바꾸며, 온갖 수난을 겪으며 죽고, 죽은 직후 얼마 되지 않아서 부활했다고 하는는 그 이야기 말이다. 당시의 기준에서 보면 오히려 그 수많은 요소들이 전혀 이상하거나 특이할 것이라고는 없는 흔해빠진 이야기에 가깝다. 그러므로 종합해서 보자면 "예수는 신화다."4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그토록 역설한 부활 신앙이 현대에 와서는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바울의 부활신앙은 현대에 와서도, 아니 오히려 현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통찰과 깨달음을 가르쳐준다고 할 수 있다. 즉,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십자가와 부활'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실존적이고, 심리적이면서, 정치적인 측면 등 모두에서 '십자가와 부활'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미해결 과제'다. 게다가 예수가 신화라고 해서 뭐 어쩌라는 말인가? 오히려 우리는 예수라는 신화를 해체하고 새롭게 뒤트는 방식으로 복음서에 '틈'을 내어서 더욱 가치있는 열린 사유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애증의 유산으로 상속된 예수와 그 부활 내러티브를 이제는 어떻게 해체할 수 있을까? (다음 편에 계속...)
1 <팬데믹의 현재적 기원>, 롭 월러스 지음, 구정은·이지선 옮김, 너머북스, 2020 참고
2 고린도 전서 15:14-15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3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도올 김용옥 지음, 통나무, 2019 참고
4 <예수는 신화다>, 티모시 프릭·피터 갠디 지음, 승영조 옮김, 미지북스, 2009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