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도 정신분석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어려움이 따릅니다. 여러분들은 의학 강의에서 <보는> 데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정신분석 강의>,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홍혜경·임홍빈 옮김, 열린책들, 2003, p.19)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은 남의 말을 들음으로써만 배울 수 있습니다. 이차적인 중개에 의해 진행되는 이러한 수업을 통해서 여러분은 자신만의 판단을 내리기에 별로 익숙하지 않은 조건 속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문제의 관건은 상당 부분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그 증인을 여러분들이 얼마만큼 신뢰하는지의 여부에 좌우됩니다."
(<정신분석 강의>,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홍혜경·임홍빈 옮김, 열린책들, 2003, p.21)
“철학은 평면거울을 통해 세계의 빛을 비추고, 그러한 시각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는 남성 주체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반사하고 시각적으로 나르시시즘적인 자기동일성을 재확인하며 구축한 남근시각중심적인 세계이다. 여기서 여성은 자기 자신을 시각적으로 재현할 도구가 없기 때문에 나르시시즘적인 남성 주체와 자기를 동일시하며, 그러한 ‘남성적 반사구조’ 속에 갇히게 된다.”
(<시각의 폭력>, 유서연 지음, 동녘, 2021, p.207)
정신분석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과정이다. 애초에 '들을 수밖에' 없는 '대화치료'(talking cure)의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서구의 유구한 시각중심적 사유(ocularcentrism)와 대립된다고 볼 수 있다. 시각중심적 사유는 주체가 타자를 시선으로써 파악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폭력성의 위험이 짙다. 나르시시즘적인 주체가 은밀하게 대상을 바라보며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관음증적 시선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결과의 대표적 예시가 딥페이크, N번방 사건, 리벤지 포르노 등과 같은 범죄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면에 정신분석은 결코 보이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이다. 도무지 무어라 말할 지 예측할 수 없는 분석주체의 목소리에 수동적으로, 그러면서도 꽤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여야 할 수밖에 없는 과정인 것이다. 레비나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무한한 타자의 목소리를 환대하고자 하는 '윤리적 전환'(ethical turn)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마치 '고향을 버리고 떠나라'라거나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와 같은 주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길이 없는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자신의 고향을 버리고 그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가나안을 향해 방랑하기를 결단하는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정신분석은 '분석할 수 없는 것'을 '분석하는' 치열한 해석과 결단이 요구되는 장이다.
"언어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사람들 사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리 치료에 이용하는 언어를 평가 절하해서는 안 되고 분석가와 환자가 주고받는 말들을 들을 수 있는 청취자가 될 수 있는 것에 만족해야만 합니다."
(<정신분석 강의>,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홍혜경·임홍빈 옮김, 열린책들, 2003, p.20)
"단어는 개념의 씨앗이 되고, 개념은 예측의 원동력이 되며, 예측을 통해 신체 예산이 조절되고, 신체 예산에 따라 기분이 좌우된다. 따라서 당신의 어휘가 섬세할수록 당신의 뇌는 더 정밀한 예측을 통해 신체 수요에 알맞게 예산을 조절할 수 있다. 실제로 감정 입자도가 더 높은 사람들은 병원을 덜 방문하고, 약을 덜 먹고, 병에 걸려 입원해 있는 기간도 더 짧다. 이것은 마술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 사이의 경계가 꽉 막혀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사 펠드먼 베럿 지음, 생각연구소, 2017, p.337)
언어, 특히 그중에서도 은유적 언어(metaphorical language)는 주체가 세계를 인식하는 틀(frame)을 형성하거나 바꾸는 데 크게 기여한다.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G. Lakoff and M. Johnson)의 저작 <삶으로서의 은유>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도록 이끌어주는 개념 체계는 근본적으로 은유적이라고 한다. 이들은 은유가 단순히 언어적 기교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이끌어 가는 중심적 원리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어떤 은유를 살펴보는지 잘 살펴보면 그 사람이 인생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지를 추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으로 추론해보자면, 은유를 바꾸면 인생도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나와 간단한 상담을 나눈 친구의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그 친구는 연애를 할 때 애인이 본인을 존중하지도 않고 소중히 대접하지 않고 있다는 불쾌한 느낌이 들어서 헤어졌으면서도 마음이 너무 힘들다는 고민을 내게 털어놓았다. 평소에는 나쁘면서도 아주 드물게 본인을 즐겁게 해준 기억때문에 이별이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쭉 나누다보니 '나쁜 남자에게 자꾸만 끌려!'와 같은 문제와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별안간 생각에 잠긴 나는 그 친구에게 "걔는 담배같은 새끼야, 담배"라는 말을 툭 던졌다. 그러면서 바로 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였다.
"단순히 헤어졌던 그 새끼한테 끌린다고 해서 그 새끼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좋은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어. 담배에 끌린다고 해서 담배가 좋은 게 아닌 것처럼 말야. 그건 그저 담배라는 유해물질에 중독돼서 습관적으로 손이 가는 것 뿐이지. 그런 점에서 그 새끼도 똑같이 담배같은 새끼야. 잘 기억해두자."
이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던 친구는 순간적으로 깨달음을 얻었는지 경탄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에도 그 친구는 적어도 당시에 헤어진 전 남친 문제 때문에 크게 고민하거나 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고 한다. '담배'라는 단순한 은유를 통해 그 친구의 개념 체계를 비교적 쉽게 리모델링한 셈이다. 그저 밋밋한 언어로 비슷한 내용의 조언을 전달했다면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변화가 생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새로운 은유적 표현을 통해서 그동안 깨닫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은유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있을까? 잠깐 하던 일을 나 자신을 포함한 주변을 둘러보자. 그리고 생각이 나는대로 자유롭게 다채로운 은유들로 그것들을 느껴보도록 하자. 그러다보면 결국 우리의 삶 또한 다채로운 의미와 감정들로 풍성해질 것이다.
"의학 분야 내에서도 정신 의학은 관찰된 정신 장애들을 기술하고 임상적인 질병 증상으로 종합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정신 의학자 자신도 기술적인 나열 그 자체만을 가지고 과학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질병 증상들을 이루고 있는 징후들의 유래나 메커니즘, 상호 관계 등에 관해서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징후들에 부합하는 해부학적 정신 기관의 논증가능한 변화도 없고, 설사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징후를 설명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장애들이 치료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그 밖의 어떤 신체적인 질환의 부작용으로 인식될 때뿐입니다."
(<정신분석 강의>,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홍혜경·임홍빈 옮김, 열린책들, 2003, p.25)
"DSM-III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스피처 교수는 정신질환에 대한 진단의 신뢰성을 개선하는 것에 가장 큰 방점을 두었다. 동일한 환자에 대해 의사들이 저마다 서로 제각각인 진단을 내리는 상황은 막아보자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정신과 의사들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조작적(operational) 개념과 방법을 통해 정신질환에 대한 진단 기준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했다. 그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바로 증상(symptom) 중심의 진단 기준이다. DSM-III에 따르면 정신과 의사는 현재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증상만을 관찰하고 그에 근거하여 환자가 특정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지 여부를 판정한다. 우울증의 경우 의사들은 요즘 우울한 기분이 얼마나 자주 드는지, 요즘 얼마나 자주 우는지, 집중력 감퇴를 경험하는지 등과 같은 증상에 대한 질문을 환자에게 묻고, 그에 대하여 충분히 많은 긍정적 답변이 돌아오는 경우 우울증 진단이 내려진다."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2122 (정신의학의 과학성에 대한 의심))
"스피처의 의도대로 DSM-III 이후의 진단 기준에서 신뢰성의 문제는 획기적으로 개선됐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진단의 정확성 혹은 타당성이 현격히 떨어진다는 문제(the problem of validity)가 새롭게 정신의학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우울증 환자가 아닌 사람을 우울증 환자로 잘못 진단하거나 우울증 환자를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고 잘못 진단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말이다. 신뢰성을 높이기 위하여 정신과 의사들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조작적 기준에만 집착하다 보니 진단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게임중독자와 임요한 같은 프로게이머를 비교해 보자. 분명 한 사람은 정신병 환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단순 증상만으로 그 둘을 구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둘 모두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컴퓨터 게임으로 보내고, 둘 모두 게임을 하고픈 충동을 거부하지 못하며, 둘 모두 게임을 하지 않을 때 불안감을 느낀다. 그 둘을 구분하기 위해선 그들의 심리에 대한 좀 더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요소들을 진단의 기준에 포함시켜야 하지만 이는 진단의 신뢰성을 일정 부분 포기할 때에나 가능하다."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2122 (정신의학의 과학성에 대한 의심))
정신 질환들을 진단하거나 분류하고자 할 때 겉으로 보이는 증상(symptom)들만 단순히 나열하는 방식은 곧바로 '타당성 문제'(the problem of validity)에 직면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실제로는 공황장애 환자가 아닌 사람을 공황장애 환자로 잘못 진단한다거나 또는 그 역의 경우가 자주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신뢰성의 문제(the problem of reliability)를 해결하고자 정신과 의사들이 조작적 기준에만 집착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여전히 정신의학은 다른 의학 분야에 비해 과학성이 턱없이 떨어지는 분야에 머물러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의학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요즘이라고 해서 프로이트 시절에 비해 크게 앞서나간 점은 딱히 없는 듯하다.
"정신분석이 내세우고 있는 이러한 반갑잖은 주장 중에서 가장 첫번째로 제기되는 것은 정신적인 과정들은 그 자체가 무의식적이며, 의식Bewußtsein적인 것은 정신 활동 전체 중에서 단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석 강의>,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홍혜경·임홍빈 옮김, 열린책들, 2003, p.26)
"정신분석은 의식과 정신의 동일성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은 정신을 감정, 사고, 의지와 같은 과정으로 정의하며 무의식적인 사고나 무의식적인 의지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정신분석 강의>,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홍혜경·임홍빈 옮김, 열린책들, 2003, p.27)
"이제 많은 인지과학자들은 의식이 정신생활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우리의 굉장히 큰 정신작용들이 의식 없이도 수행된다고 주장한다(그 개요에 대해서는 Bargh & Chartrand, 1999)."
(<뇌와 내부세계>, 마크 솜즈 · 올리버 턴불 지음, 김종주 옮김, 하나의학사, 2005, p.116)
"우리는 문화란 생존을 위한 역경이라는 추진력 밑에서 본능 충동을 희생함으로써 창조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문화는 인간 사회 속에 새로이 등장하게 되는 개개인들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본능 충족Triebbefriedigung의 희생을 되풀이함으로써 항상 새롭게 다시 창조되곤 합니다. 이렇게 문화의 창달을 위해 사용된 본능적 힘들 중에서 성 충동Sexualtrieb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적 욕망들은 그 과정 속에서 승화됩니다. 다시 말하면 본래의 성적인 목표에서 다른 방향으로 돌려져서 더 이상 성적인 특성을 갖고 있지 않은, 사회적으로 더욱 고상한 측면으로 향하게 됩니다."
(<정신분석 강의>,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홍혜경·임홍빈 옮김, 열린책들, 2003, p.28)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너무나도 불안정하고 성 충동은 그저 약하게 통제될 뿐이어서 문화적인 활동에 참가하려고 하는 모든 개개인들에게는 본능 충동을 이렇게 사용하기를 거부하려는 위험이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성적 충동이 해방되어 원래의 목표로 회귀하려는 경향성이 강화될 때 빚어지는 위험을 자신의 문화에 대한 가장 무서운 위협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므로 사회는 그 근거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가장 예민한 부분이 건드려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사회는 또 이러한 성 충동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인정하거나 성생활Sexualleben이 개개인에게 가지는 중요성을 설명하는 데 조금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교육적인 목적에서 이 부분에 대한 주의를 딴 곳으로 돌려 버리는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 강의>,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홍혜경·임홍빈 옮김, 열린책들, 2003, pp.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