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널리 퍼지게 된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인지 감수성’입니다. 제가 검색해 보니 이 말은 원래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 여성대회에서 처음 주장된 것으로 확인되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성별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동시에 이를 민감하게 이해하여 양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태도의 천명이었습니다. 결국 개인이나 조직, 사회가 성별에 따른 편견이나 불평등을 인식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행동과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 이 개념의 출발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우리 사회에서 오늘날의 무게를 갖는 어휘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우리 대법원의 행정소송 판결(대법원 2018. 4. 12. 선고 2017두 74702 판결)에서 처음 등장한 후, 이것을 형사판결(대법원 2018. 10. 25. 선고 2018도 7709 판결)이 원용하기 시작하던 2018년부터였습니다.
대법원은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의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하여 성폭행이나 성희롱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피해자가 부정적인 여론이나 불이익한 처우 및 신분 노출의 피해 등을 입기도 하여 온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및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별적, 구체적인 사건에서 성폭행 등의 피해자가 처하여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라고 판시하였는데,
쉽게 말하면 법원이 성폭행 사건과 같은 범죄사실의 존부를 판단할 때는 피해자의 진술의 신빙성과 간접사실을 평가해야 하지만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성인지적 관점에서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삼자가 생각하는 ‘피해자 다움’을 전제로 ‘피해자라면 마땅히 보여야 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거나, ‘피해자의 반응으로는 수긍하기 어려워 보인다'라고 하여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배척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법원이 성범죄 사건에서 언급하는 "성인지 감수성"은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성인지 감수성과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두 개념 모두 성별 차이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강조하지만, 법적 맥락에서의 적용 방식과 그 목적이 전혀 다릅니다. 대법원이 위 판결로써 말하는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것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기준'으로써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상황과 정황을 충분히 고려하여 그 진술의 신빙성과 증명력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과 피해자가 진술하는 상황을 중요하게 고려하여, 피해자가 처한 환경과 정서를 이해하고 이를 기반으로 사건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법원의 판단은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높게 평가하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의 정황을 이해하도록 하기 때문에 사실상 피해자의 진술 하나만으로도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서단을 열게 됩니다.
이것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이 성취하려고 했던, 성별 차이에 대한 인식, 교육,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성차별을 인지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나 정책의 입안을 벗어나, 사법부가 인간의 문명사와 함께 스스로 성장시켜 온 원칙들을 그 자신이 뒤흔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낳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회사원 A와 동료직원 B가 있는데 00 리조트에서 워크샵을 하게 되었습니다. 워크샵 중 저녁 시간, 여러 직원들과 함께 술을 마신 후, A와 B는 같은 방에서 쉬게 되었는데 B는 술에 취해 잠이 들었고 그동안 A는 B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고 가정합니다(이것은 실제 사례가 아니며 제가 설명을 위해 그럴듯하게 지어낸 것임을 먼저 밝힙니다).
이 사건은 증거로만 보면 이렇습니다. 이 방에는 CCTV나 녹음 장치가 없어 강제추행이 발생했다는 객관적이고 직접적인 증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따로 추행을 목격하지 못했으며, 당시 회식 상황에 대해서 추행과 관련하여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기억도 사실 없습니다. 이 사안에서 A는 일관되고 극렬하게 자신의 강제추행 혐의를 부인하며, 자신은 B가 취해 쓰러진 것을 도우려 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한편 피해자 B는 당시 술에 취해 명확한 기억이 없다고 하면서도 단지 자신이 이상한 느낌이 들어 깨어났을 때 A가 자신의 근처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판을 거치는 동안 B의 진술은 일관되지 않았고, 다시 생각해 보니 A가 자신을 부축하는 것처럼 하면서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손이 가슴부위에 상당시간 닿았으며 부축할 것이라면 손을 굳이 가슴에 댈 필요는 없다고 진술합니다(물론 A는 부축을 했을 뿐 손이 가슴에 닿은 사실조차 없다고 계속 주장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를 판단하는 제삼자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이 정도의 증거관계로는 유죄판결을 할 정도의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는 증명이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B의 진술은 술에 취해 잘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진술이고 나중에서야 A가 자신을 부축하려고 했다는 상황에서 가슴을 만졌다는 말을 하고 있어 그 진술의 신빙성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아마도 이 정도라면 무죄가 선고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법원의 성인지감수성론을 적용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피해자의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법원은 오히려 B가 술에 취해 무방비 상태였다는 B의 취약함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비록 B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았지만, 성인지 감수성에 의거해 피해자가 당시 상황에서 느꼈을 공포와 불안감이 법정에서의 진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며, 오히려 A의 추행과 같은 주요 사실에 있어서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B의 입장에서 그 상황을 재구성한 뒤 그녀가 뭔가 이상한 느낌으로 깨어났다는 점과 그때 A가 근처에 있었던 점을 중시합니다.
그리고 피해자 B가 사건 이후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다는 사실 등 심리적 고통과 트라우마를 입었다는 진단서에다가, 술에 취해 사건 당시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그 자신에게는 불리할 수도 있는 진술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히려 나머지 진술들에 더욱 신빙성이 간다'는 평가를 보태어 놓은 후, B가 특별히 허위사실을 지어내 A를 무고할 이유도 없다고 보는데 이르게 되면,
결국 객관적 증거가 전혀 없거나 사실상 없는 상황에서도 피해자의 진술이 중요한 증거로 받아들여져 A는 유죄로 판단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될까요
A는 죄를 인정하지 않고 무죄를 주장하다가 성범죄의 유죄를 선고받았으므로 반성의 기미가 없었던 죄질이 매우 나쁜 사람이 되어 실형이나 최소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직장에서 해고나 파면을 당하게 되고 형량에 따라 최소 향후 10여 년간 자신의 신상정보를 거주지 관할 경찰서에 매년 갱신하여 등록해야 하며 재취업이 제한됨은 물론 각종 보안처분을 받게 됩니다. 인생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A가 원래 무죄였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A가 유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유죄로 단정하기에 부족한 증거관계에서도 성인지 감수성이론은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성인지 감수성 이론이 도입된 이후 성범죄 기소에 대한 유죄 판결률이 정확히 얼마나 크게 증가했는지 그 통계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2018년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적용한 판결 이후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도 유죄 판결이 나오는 사례가 증가했다는 것은 법조계에 정설로 자리 잡고 있고, 한 연구에 따르면 성인지 감수성을 적용한 57건의 성범죄 사건 중 56건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2019.04.10 18:07 한경닷컴).
성인지감수성은 양성평등을 실현 하기 위한 훌륭한 개념적 목표가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이념이지 특정 범죄의 성립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범죄의 성립여부를 판단하는 많은 기준들을 가지고 있고, 이 기준들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가 문명화를 이루어내면서 투쟁으로 확립해 온 것들입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됩니다(무죄추정의 원칙). 그러나 성인지감수성을 강조하면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유죄를 인정할 수 있게 되므로, 피고인의 무죄 추정 원칙이 침해될 수 있습니다. 이는 형사사법 체계의 본질을 흔드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법부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는 증거에 의해야 합니다(증거재판주의). 그러나 성인지 감수성을 기준으로 하면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객관적 증거의 중요성이 희석될 수 있으며 결국 이는 성범죄에서 증거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것이 주관적이고 모호한 개념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판사에 따라서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르게 판단될 가능성을 내포하게 됩니다. 이것은 법적 안정성을 저해함으로써 피고인과 피해자 모두에게 예측 가능한 법적 결과를 제공하지 못하게 합니다(사법부의 신뢰 저하).
성인지감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피고인이 제출하는 반대 증거가 충분히, 또는 전혀 고려되지 않거나, 유죄의 입증책임을 검사가 지는 것이 아니라 무죄의 입증책임을 오히려 피고인에게 전가시키는 위험이 있습니다(거증책임의 전환 및 증거채택의 확증편향성).
무죄추정의 원칙을 시작으로 위에서 언급한 사법의 대원칙들을 돌아보면 성인지감수성을 성범죄 사건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이 법적 안정성과 공정성을 저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법적 판단은 우리가 이미 치열하게 확립한 객관적 증거와 공정한 절차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성인지 감수성은 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함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합니다.
“It is better that ten guilty persons escape than that one innocent suffer.”
- Sir William Blackstone
"죄를 지은 10명이 도망가는 것이 무고한 1명이 고통받는 것보다 낫다."
윌리엄 블랙스톤(1723-1780)
영국의 법학자, 판사 "Commentaries on the Laws of England"
#법무법인흥인 #전상민변호사 #인천변호사 #인천형사변호사 #인천형사전문변호사 #성인지감수성 #성범죄판례 #대법원판결 #성폭력사건 #성범죄진술신빙성 #무죄추정의원칙 #증거재판주의 #형사사법체계 #성범죄변호사 #성범죄전문변호사 #성범죄유죄율 #성범죄무죄판결 #성범죄피해자보호 #법적안정성 #형사전문변호사
성범죄, 성범죄전문, 성범죄특징, 성인지감수성, 성폭행, 성범죄사건, 성폭행사건, 성범죄피해자, 형사변호사, 형사전문변호사, 성범죄변호사, 성범죄전문변호사
<2024. 7. 22. 이글의 모든 저작권은 전상민 변호사에게 있습니다.>
법무법인 흥인 전상민 대표 변호사
법무법인 흥인 | Tel: 032 872 1650 | Fax: 032 872 1652
인천광역시 남구 소성로 159(학익동, 202호) (우) 22219
Mobile: +82 10 4541 1650 | E-mail: ddabil@naver.com| blog: https://blog.naver.com/phillaw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