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영화] <미성년>, 김윤석의 세계가 활짝 열리다
▲영화 <미성년>의 한 장면.ⓒ 쇼박스
첫 장면은 교복을 입은 앳된 얼굴의 소녀가 한 식당 창문을 훔쳐 보는 모습이었다. 주리(김혜준)의 눈은 한 사내를 바삐 쫓고 있었고, 카메라는 그의 떨리는 눈과 식당 안 화기애애한 공기를 대비시켰다. 사내를 쫓는 눈은 종종 식당 주인으로 보이는 미희(김소진)에게 머문다.
주리가 왜 그 식당을 찾아갔는지 그리고 그가 관찰한 이들과 어떤 관계인지 금세 드러난다. '불륜'이다. 집에서 자상하던 아빠 대원(김윤석)이 엄마 영주(염정아) 몰래 식당 아줌마와 바람을 피운다. 영화 <미성년>은 그렇게 어른들 세계를 반강제적으로 접하게 된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설득력 있는 인물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오랜 경력의 배우 김윤석이 처음으로 연출자로 나섰기 때문만은 아니다. 배우 출신 신인 감독이든, 기성 감독이든 혹은 학교 졸업 작품이든 이름을 걸고 개봉하는 모든 작품은 관객들 눈에선 같은 위치에서 평가받는다. <미성년> 역시 마찬가지 운명일 것이고, 김윤석 본인도 자신의 그간 경력이 이 영화 평가에 영향을 주길 원치 않을 것이다.
이 잣대로 <미성년>을 바라보면, 그러니까 감독 김윤석을 지우고 본다면 영화를 불륜을 소재로 한 소극으로 치부하기에 매우 아깝다. 대원과 미희의 불장난 같은 사랑이 사건의 불쏘시개 역할은 하지만,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관객에게 유의미한 질문 몇 가지를 던지기 때문.
제목대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건 주리, 그리고 미희의 딸이자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힌 윤아(박세진)다. 미희가 대원을 유혹했다고 여기고 다짜고짜 윤아를 쏘아붙이는 주리는 반대로 모범생이다. 평소라면 쉽게 어울리지 않았을 이들이 어른의 문제로 격렬하게 맞붙는다. 영화의 상당 분량은 바로 이 두 '미성년'이 싸우고, 점차 서로를 이해해 가는 데 할애됐다.
이에 비해 대원은 궁상맞은 핑계를 대거나 자신이 나서야 할 때 피해버리는 식이다. 이런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으로 표현되는 중년 남성의 어떤 상징과도 같다.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지만 동시에 지극히 외로우며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약한 남성. 이는 오래 전에 미희와 윤아를 등지고 집을 뛰쳐나간 윤아 아빠(이희준)에게서도 볼 수 있는 면모다.
▲영화 <미성년>의 한 장면.ⓒ 쇼박스
굳이 남성으로 치환하고 싶진 않다. 오히려 젠더적 접근이 <미성년>의 감상과 해석을 좁히는 틀이 될 여지가 있다. 영주와 미희가 영화에서 두 남성보다 주체적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이들 역시 아이들 앞에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어른일 뿐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주리와 윤아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게 옳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다름 아닌 아기다. 대원과 미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른들, 혹은 어른이라 믿던 중년 남녀가 잠깐 사귀면서 나오게 된 존재다. 보통의 치정극이라면 아기를 두고 또 다른 갈등이 생기겠지만 정작 주리와 윤아에게 불륜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중요치 않아 보인다.
남는 질문들
영화 <미성년>에는 직면한 문제와 현실을 회피하는 어른과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두 소녀가 등장한다. 그럴싸한 말로 핑계를 대는 어른과 투박하고 거친 욕설을 던질지라도 책임을 지려는 두 소녀. 이 대비가 <미성년>을 즐길 두 번째 묘미다. 영화의 말미 대부분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이다. '진짜 성년은 누구일까', '성년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법정 성인 연령 만 20세. 국가와 제도는 이렇게 살아온 경력을 기준으로 성년과 미성년을 나눈다. 그에 따라 법적 처벌 수위도 다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어른, 책임지고 인정할 줄 알며 이성적이고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법적 성인들이 아니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작아진 어른들의 모습이 다소 코믹하게 다가올 여지도 있다.
참고로 원작은 <옥상 위의 카우보이>라는 창작극이다. 2014년 연말 배우들과 함께 하는 일종의 시연회에서 이 작품을 접한 김윤석이 영화화를 결심했다. 원작자인 이보람 작가와 4년간 시나리오 수정 작업을 거친 결과물이 지금의 영화가 됐다.
▲영화 <미성년>의 한 장면.ⓒ 쇼박스
영화 외적으로 <미성년>의 미덕을 꼽자면, 바로 배우의 발굴이다. 그간 한국 상업 영화가 소재와 주제만 달리했지 대부분 기성 배우를 주요 역할에 사실상 '돌려막기'해 온 게 사실이다. 창작자로서 감독이 진짜 인정받으려면 작품의 흥행과는 별도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거나 새로운 화두를 던질 줄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에 하나 더. 진정한 창작자라면 끊임없이 좋은 재료(배우)를 발굴해야 한다.
주리 역의 김혜준, 윤아 역의 박세진을 500명의 후보진에서 오디션과 심층 면접을 통해 발굴한 김윤석 감독의 뚝심은 긍정적이다. 투자 여건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판에 박힌 기준이 전가의 보도처럼 통용되는 요즘 때에 이런 시도는 충분히 인정받아야 한다.
<미성년> 한 작품으로 김윤석 감독에 대한 판단을 하긴 이르다. 그의 인장과 개성도 확신할 수 없다. 두세 작품을 더 선보여야 하겠지만 적어도 그의 첫걸음은 세심했고, 여느 기성 감독들을 긴장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한 줄 평 : 첫 작품으로 한국 영화계를 긴장시키다
평점 : ★★★☆(3.5/5)
영화 <미성년> 관련 정보
감독 : 김윤석
각본 : 이보람, 김윤석
출연 : 염정아, 김소진, 김혜준, 박세진, 김윤석
제공 및 배급 : ㈜쇼박스
제작 : ㈜영화사 레드피터
공동제작 : ㈜화이브라더스코리아
크랭크인 : 2018년 2월 3일
크랭크업 : 2018년 4월 4일
개봉 : 2019년 4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