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사는 들으라! 내 말을 아베에게 똑똑히 전달하시오."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수요집회에서든 미국, 독일 등 해외 방문 현장에서든 아흔 살 김복동 할머니는 꼭 일본대사관을 향해 그렇게 외치곤 했다. 전범국으로서 저지른 강제 성노예 사건, 근로정신대 사건 등에 대해 분명하게 사과하라는 게 그의 일관된 요구였다.
다큐멘터리 <김복동>이 그간 성노예 피해자나 근로정신대 피해자를 다룬 작품과 가장 크게 달랐던 건 한 인물을 대하는 태도다. 여러 작품이 피해 사실과 일본의 범죄 행위를 부각하면서 작품 속 인물은 대부분 약한 피해자에 머물곤 했다. <김복동>은 피해 사실을 처음 고백한 이후로 27년간 김복동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살아왔고, 그가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 오롯이 담아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일상에서 힘없고 약해 보이는 노인이 현장에선 그 누구보다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모습이었다. 영화는 평소 정갈하고 깔끔한 그의 성격을 교차로 제시하며 김복동이 왜 그토록 일본의 사과를 외쳤는지 서서히 설득해 나간다. 1992년 두려움을 안고 처음 피해 사실을 고백한 김복동이 임종 직전 평화인권운동가로 나아간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복동이 원했던 것
▲영화 <김복동> 스틸컷ⓒ 엣나인필름
"나는 하고 싶은 건 하는 사람이다. 눈이 지금 안 보이지만 그래도 입은 살았으니까. 내가 해야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보이지만 그의 발언엔 어떤 결기가 서려 있다. 영화에는 피해사실을 고백한 이후 그가 기대했던 게 당시 우리 정부의 일방적 결정으로 무너지고, 고향인 부산에 내려갔으나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되는 계기가 묘사돼 있다. 그의 결기는 겉으로는 약해 보일지언정 결코 쉽게 흩어지거나 할 성질이 아님을 영화를 보면서 느끼게 된다.
영화에 어떤 특별한 미학적 장치는 없다. 영상 대부분은 '미디어몽구'로 알려진 활동가 김정환씨가 촬영한 것들이다. 2011년 한 기사를 우연히 보고 할머니를 알게 된 이후 김정환씨는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취재에 임했다. 여기에 정의기억연대 등에서 보유한 과거 영상이 보태지고, <뉴스타파> 측이 몇 가지 브릿지 영상을 가미하고 재구성한 게 지금의 결과물이다.
"점점 일본이 극우화되니 할머니는 다소 돌아가는 방법을 택하셨다. 해외로 나가서 목소리를 내신 거지. 이 타임라인을 기반으로 할머니가 어떻게 대응해서 싸웠는지를 보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송원근 감독은 위와 같이 설명했다. 김복동이라는 인물이 단순히 목소리만 낸 게 아닌 계획과 목표를 갖고 움직였다는 것. 김복동 할머니를 인권운동가로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일본은 현재 과거사 사과는커녕 한국, 미국, 북한 외교 관계에서 자국의 입지를 알리기 위해 보복 무역을 하는 등 온갖 꼼수를 부리고 있다. 자국 역사 교과서에 한일 강제 합병, 성노예 범죄 사실을 축소하거나 삭제하는 움직임도 이어가고 있다. 만약 김복동 할머니었다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의 빈 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질 법하다.
영화의 내레이션은 배우 한지민이 맡았다. 마침 2017년 '기억의 터' 1주년 행사의 홍보대사로 활동한 이력이 있었다. 한지민 역시 김복동 할머니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제작진이 요청했을 때 흔쾌히 응했다는 후문이다. 여러모로 영화엔 많은 사람들이 진정성이 모여 있었고, 그걸 작품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번 영화에서 유독 여운이 남을 법한 존재가 바로 소녀상이다. 다양한 상황과 각도에서 잡은 소녀상의 모습 또한 일본의 행동과 비교하면서 관람하길 추천한다.
영화 <김복동> 관련 정보
감독: 송원근
내레이션: 한지민
제작: 뉴스타파
기획: 뉴스타파, 정의기억연대
영상기록: 미디어몽구
공동제공 및 배급: 엣나인필름
상영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01분
개봉: 2019년 8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