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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필록 Nov 14. 2020

교토, 잠시 내려놓기. #1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흔히 직장생활의 위기는 3년마다 찾아온다고 합니다. 지금도 다니고 있는 회사의 3년 차 해였던 2019년, 저는 일종의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을 겪고 있었습니다. 의욕은 떨어졌고, 이유 없는 짜증이 많아졌지요. 매일 아침 출근을 할 때면 '쉬고 싶다.'라는 생각만 가득했던 시기였습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는 3월 말에서 4월 초쯤에 휴가를 정합니다. 원래는 가을쯤 가려고 했지만 그 당시 너무 지쳐있던 저는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4월 중순에 휴가를 쓰게 됩니다.


한 해 전이었던 2018년에 이미 오사카를 다녀오면서 일본 여행은 경험을 한 상태였던 저는 그때의 추억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한 번 더 일본 여행을 가고자 했고, 지난 오사카 여행에서 일정상 가지 못했던 교토를 경험하기 위해 다시 한번 간사이공항으로 가는 티켓을 끊습니다.


오사카에서 교토까지의 거리는 약 60킬로미터 정도로, 제가 살고 있는 부산에서 울산 정도 거리의 인접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두 도시의 분위기는 반대라고 할까요. 오사카가 화려한 풍경의 대도시라면 교토는 전통적인 멋을 간직하고 있는 조금 더 차분한 느낌의 곳이에요. 두 도시를 모두 경험해 본 많은 사람들이 비유하듯, 오사카는 일본의 부산 같은 느낌이고, 교토는 일본의 경주 같은 곳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교토역에 도착해서 밖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교토타워. 미세먼지가 없는 깨끗한 하늘이 매우 좋았다.


전통가옥을 좋아하는 저에게 교토 여행은 기대를 품게 하기에 충분한 곳이었고, 그 기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어요. 특히 제가 숙소를 잡은 '가와라마치' 인근은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듯한, 신비로운 공간이었습니다. 백화점과 호텔 빌딩들 사이의 골목을 들어서면, 촘촘히 들어선 쇼핑 아케이드 중간에 갑자기 한눈에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신사가 나타납니다. 카모 강 주변에 늘어선 선술집들은 너 나할 것 없이 오래된 목조건물 양식 그대로 지어져 있고, 강 건너편의 기온 거리는 그야말로 전통 그대로를 간직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교토는 오랫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곳입니다. 794년부터 1868년까지 무려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 역할을 했던 곳이었으니, 감히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닌 셈이지요. 저도 3박 4일간의 비교적 긴 일정을 계획하긴 했지만, 교토의 모든 곳을 둘러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입니다.


교토에 들르는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가게들. 눈을 유혹하는 예쁜 잡화들이 많다.


첫째 날 오후에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제가 향한 곳은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데라)입니다. 아마 교토를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가 아닐까 해요. 청수사 자체도 하나의 볼거리입니다만, 청수사를 가기 위해 올라야 하는 니넨자카와 산넨자카, 그 골목길의 풍경이 '교토다움'의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 2년, 3년 안에 죽는다는, 조금은 무서운 미신이 있습니다. 청수사로 가는 완만한 오르막길은 포장이 매우 잘 되어있긴 합니다만, 그런 속설 때문인지 다리에 조금은 힘이 더 들어가더라고요.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눈에도 담아봅니다. 숨이 조금 차려할 때쯤에 뒤를 돌아보면 호칸지(법관사, 야사카의 탑)이 나지막한 목조건물 사이에 우뚝 높게 솟아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더라고요. 저도 일행이 있었다면 한 장 남겼을 법도 하지만, 파란 눈의 여행객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교토 여행 가이드 책에 대부분 표지를 장식하는 랜드마크가 바로 이곳이에요. 교토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 분이라면, 다른 곳은 선택사항이라 하더라도 니넨자카, 산넨자카만큼은 꼭 가보시길 권해드려요.


니넨자카, 산넨자카의 광경. '교토'라는 도시를 대표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오르막길 끝에 도달하면 드디어 청수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사전 조사 때 이미 알고 있던 정보였기 때문이긴 했습니다만 제가 갔을 당시에 청수사 본관은 보수공사 중이어서 아쉽게도 들어갈 수는 없었어요. 그래도 낯선 도시에 도착한 첫날부터 여행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어서 조금은 들뜬 첫 번째 관광이었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여행지에서 웬만하면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번 교토 여행에서도 가까운 거리는 걷는 것을 목표로 하고 왔기 때문에, 청수사로 갈 때는 버스를 이용했지만, 애초에 다시 숙소로 오는 길은 걸어서 오기로 마음먹고 있었어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야사카 신사를 들렀습니다. 벚꽃을 보기엔 조금은 늦은 시기였지만, 그래도 분홍 빛이 만개한 사진을 다행히 찍을 수 있었어요. 미세먼지로부터 자유로운 날씨 덕분에 하늘색도 예쁘고 공기도 맑아서 기분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야사카신사에서.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만개한 벚꽃을 찍을 수 있었을 텐데.


다시 기온 거리를 지나, 카모 강 둔치로 내려옵니다. 이 강은 교토 중심을 흘러가는 자그마한 물줄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처럼 강 둔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각자의 사색에 빠져 있더라고요. 저도 가만히 앉아 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해봤어요. 지금의 나는 어디쯤 왔을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뭐 그런 것들이요. 교토 여행 내내 여러 차례 느끼게 되었지만, 이 도시는 정말 사색하기 좋은 곳이구나, 하고 느끼게 됐습니다. 오사카는 혼자서 여행하기엔 외로운 도시였지만 교토는 혼자서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라고 할까요. 느긋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어쩐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해가 질 무렵까지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어요.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 같았습니다. 교토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모 강.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평화롭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둘째 날은 아침부터 서둘러서 출발해야만 했어요. 교토 교외의 '오하라' 지역으로 가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교토 여행자들이 추천하는 교외 여행지는 '아라시야마' 지역이었지만, 저는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추천이 적은 '오하라'를 택했습니다. '호센인'과 '산젠인'이라는 절에서 보는 '액자 정원'의 사진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죠. 숙소 근처에서 버스를 타도 갈 수 있긴 했지만 1시간가량 버스를 탈 때 편하게 앉아서 가려면 교토 역에서 타는 것이 더 낫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숙소에서 교토역으로, 다시 오하라로 가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교토는 '버스의 도시'입니다.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지하철 노선이 그렇게 많지 않은 데다 대부분의 관광지는 지나가지 않는 관계로, 버스를 타야 할 일이 많은 도시예요. 관광 가이드북에도 버스 노선도가 매우 복잡하게 나와 있어서 처음에는 헷갈리기 일쑤였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대중교통망이 잘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웬만한 곳은 최단 루트로 가는 버스가 다 있어서, 타는 법과 노선 보는 법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교토 역에서 10분가량을 기다린 끝에, 오하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하고, 인가가 점점 드물어지는 창 밖을 바라보며, 1시간여를 달려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조금 더 차가운 공기가 느껴집니다. 산 중턱에 위치한 오하라 종점에서, 10분가량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호센인과 산젠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액자 정원'이라는 이름답게, 고요한 산사 안에서 바라보는 고목(古木)의 풍경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습니다. 교토는 한 자리에서 한참을 머무르게 하는, 마력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요.


 

호센인/산젠인에서의 고요한 시간들. 수목원에 온 듯한 기분이기도 하고, 절에서 심신수련을 한 듯한 기분이기도 했다.


오전 시간을 고스란히 이곳에서 보낸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이번에는 '이치조지'를 향해 갑니다. 이치조지 자체는 굉장히 작은 마을인 데다가 관광지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지만, 교토를 간다면 꼭 가보고 싶었던 '케이분샤 서점'을 보기 위해서였어요. 영국 가디언지에서 선정한 '세계 최고의 서점 10군데' 중에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선정된 곳이라고 합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오래된 서점이라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어요.


이치조지 근처 어딘가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서 케이분샤를 찾아왔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간판에, 사람들이 굳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한, 어쩐지 무심한 느낌의 외관을 가진 곳이었어요. 가게 안은 사진 촬영이 금지였으므로, 천천히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편지지와 편지봉투, 펜을 구매했습니다. 일본어를 못하는 사람이라 이곳에서만 판매하는 제품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기념품 하나쯤은 챙겨가고 싶었거든요.


일본 여행 동호회에서 추천받은 일본 가정식 식당 '츠바메'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규모가 크지 않은 가게인 데다가 나름 입소문이 난 곳이라 타이밍이 안 좋으면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운이 좋았는지 제가 갔을 땐 자리가 있었어요. 앉아서 바디랭귀지와 짧은 영어로 주문을 하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들이라, 건강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후식으로 이곳에서 유명한 카페인 '아카츠키 커피'까지 가고 싶었으나, 시간 관계상 생략하기로 합니다. 이치조지 역으로 가서 에이잔 열차를 타고 숙소 쪽으로 갈 예정이었으므로, 천천히 걸으며 이치조지를 탐험해봅니다.


케이분샤 서점(좌)와 이 동네에서 간판때문에 나름 유명한 생선가게(우). 이치조지는 실제 교토 사람들이 사는 한적한 동네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숙소에 잠깐 들러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전 날에 지나치기만 했던 기온 거리를 둘러보기 위해 발길을 옮깁니다. 옛 교토의 목조건축물들 사이로 많은 관광객들이 일본 전통복장을 입고 다니고 있습니다. 수학여행을 나온 듯한 학생들 무리도 있고, 익숙한 한국어가 들리기도 했지만, 의외로 서양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오사카 여행을 할 때는 1/3은 일본인, 1/3은 중국인, 나머지 1/3은 한국인이었다면, 이 곳 교토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의 비중이 높은 편은 아닌 듯합니다. 서양인들 눈에는 화려한 네온사인의 다채로운 도시보다는 기와지붕과 아기자기한 목조건축물이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의 오래된 전통양식을 보며 '꼭 가보고 싶다'라는 로망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저녁 끼니를 간단하게 해결하고 가와라마치 인근의 가게들을 구경했습니다. 예정에 없던 비가 왔던 기억이 나네요. 많은 양이 아니었기에 여행지에서 내리는 비는 오히려 운치가 있어 좋았습니다. 오사카처럼 대형 매장이 많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들이 많은 편이었어요. 지인들에게 줄 기념품들을 간단하게 구경하고, 카모 강을 끼고 늘어서 있는, '폰토쵸'를 걸어봅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 양쪽에 늘어선 술집들이 있는, 특히 밤에 걸을 때 더욱 특별한 공간이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가게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사람이 너무 많고 복잡해서, 포기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세 번째 날은 더 많이 걷는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체력을 안배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교토 여행기 두 번째 이야기로 계속됩니다..)


교토 여행기 2편은 여기에서!



기온 거리의 흔한 풍경. 일본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나중에는 현지인인지 관광객인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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