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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필록 Nov 09. 2020

가을이 가기 전에, 밀양(密陽)

지금이 아니면 안 되니까

얼마 전부터 잔잔한 물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들던 차에 누군가가 다녀온 밀양의 사진을 보고 무작정 차를 몰아 1시간여를 달려왔습니다. 원래는 창원의 주남저수지를 가려던 계획이었지만 검색해보니 밀양이 조금 더 한적한 곳이더군요.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붐비는 곳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늦기 전에 가을의 정취를 한껏 느끼고 온 것 같아 만족스러운 주말을 보냈습니다.


처음으로 찾은 곳은 '빈지소'입니다. 지역사회에선 원래 장미꽃이 유명한 곳이라는데, 계절이 계절인지라 장미꽃은 볼 수 없었고, 대신 밀양강을 가운데 두고 마주한 산이 예쁘게 물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빈지소 길에 잠시 차를 대어 두고 밀양강을 따라 걸으면 반대편에 가을이 한껏 느껴지는 풍경이 있다.


평소에 사람의 발길이 흔치 않은 곳이라 빈지소에서 마주한 사람이 채 5명도 되지 않았어요. 밀양은 인구 10만의 중소도시이지만 보이는 풍경은 2차선 도로와 시골길이 많은 곳입니다. 랜드마크가 우뚝 서 있는 관광지보다는 마음이 편해지는 공간을 더 좋아하는 저에게는 딱 맞는 여행지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예전에 철도로 쓰였던 상동터널, 지금은 포장도로가 되었다. 차들이 아주 가끔 다닌다.


빈지소에서 밀양강을 끼고 다리 하나를 건너면 나오는 곳이 '상동터널'입니다. 이곳은 원래 기차가 다니던 철길이라고 해요. 차 한 대가 지나다닐 폭 보단 넓고 두 대가 다니기엔 좁은 정도의 길입니다. 빈지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을 찍는 동안 지나가는 차는 제 차 포함 단 3대에 불과했으니까요. 두 개의 짧은 터널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요하게 흐르는 강물과 바람에 사각거리는 낙엽 소리만 들리는, 평화롭지만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어요. 


도시에서는 쉽게 만나기 힘든, 감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와 바닥을 온통 노랗게 물들인 은행나무의 낙엽.


들어온 길을 따라, 이번엔 밀양강 둔치에 길게 자리한 공원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밀양의 유명한 관광지인 영남루와 강을 마주 보고 있는 공원입니다. 도시의 공원과는 느낌이 다른, 느린 박자가 느껴지는 곳이었어요. 어쩐지 밀양강의 물살마저도 느리게 느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한참을 앉아서 가을을 곱씹어봅니다. 그리고 오늘의 여행이 이번 마지막 가을을 느끼는 날이 될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멀리 보이는 빨간 산이며 파란 하늘, 산책을 나온 오리 가족들을 눈에 오래도록 담아두었지요.


밀양강 둔치공원. 강물 색에도 가을이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오늘의 마지막 여행지는 들렀던 곳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인 '영남루'였습니다. 영남루는 보물 제147호로 지정된, 우리나라 최고의 누각 중 하나로 꼽히는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한옥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기대를 가지고 갔던 곳이지만, 규모가 그다지 큰 편이 아닌 데다가 유명세만큼이나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에 누각에 올라가 슬쩍 사진만 찍고 내려왔습니다. 혼자 여행하는 습관이 들다 보니 사람이 많은 공간은 될 수 있으면 빠르게 보고 물러나는 습관이 생겨버렸어요. 그래도 영남루와 바로 붙어 있는 '무봉사'에 올라가 내려다본 밀양강의 경치는 가을바람만큼이나 시원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유명한 건축물을 들릴 때면, 그 건축물의 사진을 찍기 보다 그 건축물에 올랐을 때 보이는 풍경을 찍게 된다. 건축자의 관점에서 보는 느낌을 더 즐기게 된 것 같다.


여행을 다녀온 날(11/8)이 추운 날씨가 아니었던 덕에 밀양의 숲과 강 사이로 느껴지는 오후의 햇살은 따뜻했습니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다가오는 쓸쓸한 기분 사이로 비치는, 말 그대로 밀양(密陽, 비밀스러운 볕)을 느끼고 온 것 같아 오랜만에 매우 만족스러운 당일치기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을 다닐 때면 사진을 많이 찍는 편입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것 조차도요. 누군가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는다면,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라 대답하고 싶습니다. 가을은 매년 비슷한 낯빛으로 찾아오겠지만, 지금의 가을은 지금 뿐이니까요. 


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오랜만에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정적으로 피로도가 높은 작품이었기에 딱 한 번만 보고 외장하드 어딘가에 담아두었는데, 밀양을 다녀오니 다시 보고 싶은 욕구가 들더라고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을 때 보는 행운은, 타이밍을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지요. 오래도록 바라보고 눈에 담은 가을과도(그래도 내심 서운하지만) 이제는 작별을 해도 괜찮겠구나, 하고 오늘 안녕을 고해봅니다. 여러분들의 가을도 부디 안녕하시길.


'밀양'이라는 낱말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계절은 아마도 가을이 아닐까.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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