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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필록 Nov 15. 2020

교토, 잠시 내려놓기. #2

그리고 다시, 집어들기.

(1편에 이어서...)


원래 계획대로라면 셋째 날 아침 일찍 일명 '여우 신사'라 불리는 '후시미 이나리 신사'를 갔어야 했지만, 컨디션이 안 좋은 탓에 조금 더 잠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금방 회복된 탓에 다음 일정은 갈 수가 있게 되었어요.(아쉽지만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과감히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철학의 길'을 걸으며, 그 근방에 있는 '은각사'와 '젠린지', '난젠지'를 들렀다 오는 코스였습니다. 3박 4일 일정 중에서 가장 많이 걷는 날이었으므로 조금 걱정은 되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교토를 보기 위해 몸을 일으켜봅니다.


벚꽃이 지고 있는 철학의 길(좌)과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한 느낌의 은각사(우).


'철학의 길'은 일본의 근대 철학자 '니시타 키타로(西田幾多郞)'가 사색하며 자주 걸었던 길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해서 길 입구에 들어서니,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조용한 길이 펼쳐집니다. 낙화하는 벚꽃이 더욱 걸으며 생각하기 좋은 풍광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철학의 길에서 잠시 샛길로 빠져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사찰이 '은각사(銀閣寺, 긴카쿠지)'입니다. 다른 지역에 있는 '금각사(金閣寺, 킨카쿠지)'가 금박으로 장식된 화려한 모습인 데 반해, 은각사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 다소 소박하고 단정한 느낌의 누각입니다. 금각사의 이름에 맞추기 위해 은각사로 명명했다는 속설이 있더라고요. 이번 여행에서 금각사를 가보지 못해 비교해보진 못했지만, 화려하고 큰 랜드마크보다 소소한 아름다움을 더 좋아하는 저에겐 아침 은각사의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은각사를 뒤로 하고 근처에 있는 '요지야 카페'에 들러, 말차를 마시며 잠시 쉬어 갔어요. 한 세트로 나오는 아이스크림과 양갱도 맛있습니다. 카페라기보다는 전 날 들렀던 '호센인'같은, 조그마한 절에서 내오는 다과상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도 어쩐지 말소리를 낮춰 대화를 하더라고요. 이곳에서 내뿜는 분위기 자체가 '정숙함'을 전제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요지야 카페의 메뉴와 분위기. 고요한 찻집의 느낌이 좋았다.


다시 철학의 길을 걷습니다. 길을 따라서 조그마한 하천이 흐르고 있어요. 아기자기한 가게들과 나와 같이 걷는 사람들의 숨결에서 여유가 느껴집니다. 전 날의 비 덕분인지 조금 추운 날씨이긴 했지만 공기는 더 맑았습니다. 깊게 숨을 들이마셔보기도 하고, 벤치에 가만히 앉아 떨어지는 벚꽃 잎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보잘것없는 좁고 소박한 길이, 왜 '철학의 길'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저의 글들을 읽어오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저는 걷는 것을 좋아하고 걸으며 생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느덧 3박 4일 일정의 세 번째 날이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이쯤이면 다시 돌아가서 일상의 지루함을 견딜 수 있을만한 '단단함'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에이칸도 젠린지(永観堂)'와 '난젠지(南禪寺)'입니다. 젠린지는 원래 가을 단풍이 매우 유명한 곳이라고 합니다. 고즈넉한 사찰을 천천히 걷는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었어요. 가운데에 있는 연못에 단풍이 들 때의 풍경이 일품이라, 가을에는 관광객들이 매우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다음으로 발길을 옮긴 난젠지는 사찰 자체보다는 근처에 있는 '수로각'이 더 유명한 곳입니다. 연인이며 가족들이 인생 사진을 건지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었어요. 저도 셀카는 아니지만 사람이 없는 틈에 사진을 살짝 찍어봤습니다. 사찰 옆에 있다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이긴 했습니다만 아무렴 어때요. 길지 않은 시간을 즐겨야 하는 여행객에겐 이만하면 충분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의 길 막바지에 이르러서 만날 수 있는 젠린지와 난젠지의 풍경들.


'철학의 길' 코스의 마지막은 '블루보틀 카페 교토점'이었습니다. 카페를 가는 것이 무엇이 특별한 일정인가 싶긴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에 블루보틀이 입점하기 전 시점이기도 했고, 매장 자체가 교토 느낌이 물씬 나는 목조건축이었기 때문에 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블루보틀의 시그니처 메뉴인 '뉴올리언스'를 한 잔 마시며 매장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어봅니다. 기념품으로 조금 비쌌지만 텀블러도 하나 구매했어요.(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국내에서도 구할 수 있더군요. 조금 억울했습니다.)


철학의 길을 벗어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헤이안 신궁(平安神宮)'을 향해 걷습니다. 헤이안 천도 1,100년이 되는 해인 1895년에 이를 기념해 지은 신사라고 해요. 붉은 기둥과 대비되는 파란 기와가 인상 깊은 곳이었어요. 비교적 최근에 지어져서 그런지 교토에서 본 전통 건축물 중 가장 넓고 화려한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에 와서야 처음으로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시끌벅적했고요. 조용히 더 즐기고 싶었지만, 얼른 자리를 피해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목조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블루보틀(좌)과 교토에서 가장 색이 화려한 건물이었던 헤이안 신궁(우)


숙소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다른 일정을 진행할까 생각도 했지만 다음 날을 생각해 쉬기로 했어요. 두 시간 정도를 자고 났더니 조금 괜찮아졌습니다. 슬금슬금 카모 강을 향했습니다. 편의점에서 산 간식거리를 먹으며 다시 멍 때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오사카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여기는 다음에도 꼭 오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토는 교토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매력이 넘치는 도시였어요. 올해 코로나 사태가 아니었다면, 아마 올해 휴가지도 교토가 아니었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해가 저물고 버스를 타고 오고 가다 봐 뒀던 술집에 들러 맥주 한 잔을 했습니다. 저는 술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지만, 여행지에서 마시는 술은 조금 특별한 느낌이라 좋아합니다. 피곤한 덕에 빨리 취하기는 했지만 군만두 세트와 함께 마신 아사히 생맥주는 정말 맛있었어요. 손님으로는 서양인 관광객들이 많았고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 사이에서 혼자 술을 마시자니 어쩐지 좀 외로워졌습니다.


교토에서의 마지막 밤. 한국에서도 잘하지 않는 혼술을 했었더랬다.


어느덧 교토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오후엔 공항에 갔어야 했기 때문에 특별한 일정이 있지는 않았어요. 짐을 정리하고 캐리어를 잠시 호텔 카운터에 맡겼습니다. ‘니조 성’과 근처에 있는 ‘클램프 커피’에 가는 것으로 이번 여행은 마무리하기로 합니다.


클램프 커피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찾아가기가 매우 어려웠어요. 지도 어플을 보며 조금 헤맨 끝에 도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가게 전체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들이 많습니다. 작은 숲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드는 공간이었어요. 커피와 토스트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니조 성으로 향합니다.


니조 성은 일왕이 고쇼를 지키고 쇼군이 교토를 방문할 때 머무를 목적으로 1603년에 지어진 성이라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하얀색으로 장식된 외관이 인상적인 곳이었어요. 수학여행을 온 듯한 학생 무리가 많았습니다.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빠르게 한 바퀴를 둘러보고, 마지막 여행지 방문을 마무리합니다.


클램프 커피에서의 아침. 깊은 숲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벌써 1년 반 정도가 지났네요. 여행기를 쓰며 사진을 꺼내어보고,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그곳의 정취를 잠시나마 느껴봤어요. 일상의 무게가 간혹 너무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여행지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는 것처럼, 내가 짊어져야만 하는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게 됩니다.


교토를 떠나며, 꼭 다시 이곳에 오겠노라고 다짐했어요. 모든 것을 알기엔 너무 짧았던 3박 4일 동안,  ‘살면서 한 번쯤은 가봐야 할 곳’이 아니라, ‘몇 번이고 정을 주고 들여다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고 할까요. 일정상 둘러보지 못한 곳이 아직도 많고, 다른 계절에 찾아가고 싶은 곳도 있습니다. 코로나가 종식된다면, 다음번 해외 여행지는 망설임 없이 교토가 될 것 같습니다. 잠시 내려놓기 좋은 계절에, 느리게 걸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따뜻한 교토를 만나고, 다시 돌아오려고 해요.


당연한 것들이 그리워지는 요즘, 교토를 떠올리며 일상의 무게를 가만히 다시 느껴봅니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짊어지고, 너무 빠르지 않게 걸어보자고 다짐해보는, 오늘입니다.


교토 여행기 1편은 여기에서!


 

교토에서의 짧은 나날들은 다시 일상을 버티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무거우면 잠시 내려놓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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