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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필록 Nov 24. 2020

낮은 도시, 경주

계기가 필요할 때 찾는 곳.

저의 글에서 몇 차례 언급했던 것처럼, 저는 전통가옥을 좋아합니다. 부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전통가옥을 한껏 즐길 수 있는 지역이 있다는 것은 저에게 행운이었어요. 사실 학창 시절에 수학여행의 단골 코스라 어린 시절부터 자주 가던 곳이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다시 찾아가게 되었을 때 느낌은 기억 속에 있던 그것과는 무척 달랐습니다. 네, 오늘 이야기할 곳은 바로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고장인 '경주'입니다.


 스무 살 때에 서울권으로 대학교를 진학하고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인 2010년에 저는 다시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대학 졸업장은 받지 못한 상태였고, 무분별한 소비 때문에 이곳저곳에 빚도 많았었죠.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사회생활에 대한 경험은 쌓였지만,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며 깊은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고향에 내려와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 심적으로 조금이나마 안정이 될까 했지만, 1년 정도는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여러 일들을 전전했지만 마땅히 의욕이 드는 곳은 하나도 없었고, 좌절과 실망에 익숙했던 터라 작은 실수에도 쉽게 포기해버리게 됐습니다. 몇 번 그런 사소한(하지만 당시엔 큰 용기가 필요했던) 도전과 실패를 경험하고 나니 더 이상 도전 자체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누워서 자다 깨다가만 반복하는, 무의미한 시간만 보내게 된 것이죠.


그런 저를 지켜만 보시던 한동안 말이 없던 엄마도 어느 날엔가 너무 답답하셨는지, 저에게 몇만 원의 돈을 쥐어다주며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방 안에서 꼼짝도 하기 싫었던 당시의 저는 공짜로 생긴 돈으로 그냥 술이나 사마 셔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 밤에 엄마가 이모와 통화하며 저 때문에 속상하다며 울먹이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 길로 여기서 내가 멈춰버리게 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혼자 떠나는 첫 여행지로 처음 결정된 것이 바로 경주였습니다. 막연히 부산 근처에서 가장 볼만한 관광지가 많은 곳이라 결정한 것이었는데, 이 결정이 제 이십 대의 마지막과 삽십대의 시작에 큰 영향을 끼친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반쯤은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 시간을 기다리던 것, 버스 창가로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일, 경주 버스터미널에 내려서 목적지를 향해 가던 묘한 기분 등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마주한 대릉원을 거닐고 첨성대를 우러러보며, 또 에밀레종의 역사를 읽고 안압지의 야경에 감탄하며, 이 나지막한 도시가 좋아져 버렸어요. 영화에서 위기의 순간에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제 인생의 가장 큰 위기에서 마주친 구원 같은 순간들이었거든요.

 

그리고 거짓말처럼 이 날 이후로 저는 오랫동안 다닐 수 있는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살아가는 데 있어 다시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하며 꽃길만 걸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2010년과 2011년 최악의 순간들보다는 훨씬 나은 생활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당일치기로 다녀온 잠깐의 여행 덕에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직면할 때에 어떻게 그 시기를 잘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우울해지길 원해서 우울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지만, 우울한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잘 겪어나갈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 여행으로 깨달았습니다.


 

가족들과 다녀온 보문단지 여행에서. 이 때도 한가을이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약 10년간은 못해도 2년에 한번 정도는 경주를 다녀오고 있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또는 혼자서 말이죠. 그동안의 변화도 대부분 기억하고 있어요. 천마총의 내부공사라던지 황리단길의 탄생, 월정교의 복원 같은 것들 말이죠. 황남동 일대가 재정비되면서 10년 전만큼의 소소한 풍경은 아니지만, 여전히 경주에서 보는 전통가옥은 아름답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찾아올 때마다 다음 해엔 이곳이 어떻게 또 변해있을까, 하는 호기심도 다시 이곳을 찾게 하는 큰 이유가 되었어요. 벚꽃이 많아 봄, 가을에 찾기 좋은 보문단지며 수학여행 온 기분으로 찾아가는 불국사와 석굴암, 바다에 있는 독특한 무덤인 문무대왕릉까지 대부분을 답사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못 가본 곳이 많고, 앞으로는 한 번도 찾지 않은 경주의 숨겨진 명소를 찾아서 떠나보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경주의 새로운 명소를 아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댓글 환영합니다!)


경주의 여러 풍경들. 대릉원(좌), 첨성대(중), 보문단지(우)


올해가 저물기 전에 한 번쯤은 더 경주를 갈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2020년 한 해를 마음속으로 정리해야 할 때구나, 하고 느낄 때쯤이 아닐까 해요. 그러고 보니 한 번도 겨울에는 경주를 찾지 않았던 것 같네요. 추울 때 찾는 경주의 분위기는 다른 계절과는 또 다르겠죠. 익숙함과 낯설음을 느끼고, 또 한 번의 새로운 계기를 찾아오고 싶습니다. 10년 전의 제가 집구석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처럼, 경주를 다시 만나고 오면 다가올 2021년은 왠지 저에게 행운이 뒤따를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저런 에세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분대로 쓰는 줄글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들을 쓰면서 느끼는 점이 하나 있어요. 에세이를 쓰는 사람들은 자기소개에 매우 서툰 사람들이라는 것인데요. 스스로를 한마디로 정의할 낱말이 마땅치 않아 이런저런 구구절절한 말들로 단편들을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저도 제가 여태 살아온 날들과 지금 생각하는 것들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반대로 이렇게 별 것 아닌 이야기라도 쓸 거리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쓸만한 이야기가 없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는 이야기라도 쓰는 것이죠. 겨울의 경주를 다녀와서 그런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라도, 기분 좋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여담이지만 경주에서 찍었던 예전 사진들이 어쩐 일인지 모두 다 날아가버리고 없어졌습니다. 이 글에 싣고 싶었던 예쁜 한옥들과 안압지 사진이 많았는데... 이번에 다시 가게 된다면 다시 찍어야겠네요.

 

여러가지 풍경들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경주. 겨울의 이곳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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