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한다.
코로나 시대에 여행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2주간의 자가격리를 거쳐야 하는 해외여행은 사실상 불가능한 데다 국내여행 또한 ‘언제든 코로나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준비해야 하는 탓입니다. 그러나 직장인에게 회사 내에서의 일만큼 중요한 휴가기간을 퇴근 후의 여가시간처럼 쓰고 싶진 않았기에, 생에 첫 제주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실 저에게 제주와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대학생 시절, 여름방학에 동기들과 자전거 여행을 계획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출발하는 동기 일행들과는 달리 부산에서 출발하는 당일 부산에는 태풍이 찾아왔고, 비행기는 결국 부산-제주 구간만 결항이 되었죠. 그때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제주도를 갈 기회가 저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4월 마지막 주로 예정된 휴가 일정 동안 비는 올지언정 태풍이 와서 결항될 일은 없으니 이번에야말로 제주 여행의 한을 풀고 오리라 다짐했습니다.
3박 4일 동안의 짧은 일정이었던 탓에 제주의 모든 관광지를 둘러보는 곳은 무리였으므로 여행 브이로그와 지인들의 추천 등을 통해 내가 진짜로 가고 싶은 곳들을 추렸습니다. 원래는 특정 지역에서만 쭉 머무르며 돌아볼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꼭 가야겠다고 생각한 장소들의 거리가 멀기도 했거니와 첫 여행이었으므로 한 바퀴 둘러보면서 마음에 드는 곳이 있다면 다음번에 제주를 향할 때 더욱 오래 머무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으로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항공권을 예매하고, 세 군데의 숙소를 알아보고 예약하며 역시 여행은 여행하는 기간뿐 아니라 준비하는 과정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지만, 대한민국 최대의 여행지인 제주도를 처음 가는 사람의 마음이란 한 달 전부터 심장이 두근대는 건 어쩔 수가 없더군요.
4월 26일, 드디어 제주도로 가는 날이 되었습니다.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비 소식이 있었던지라 전 날 밤에 잠을 청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걱정이 앞섰지만, 다행히도 첫째 날의 날씨는 매우 쾌청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하고 비행기를 탑승하는, 어떻게 보면 번거로운 과정까지도 설렘의 연속이었어요. 제주도를 향해 가는 많은 사람들의 표정은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지만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하늘로 떠오른 지 50분이 지나고 드디어 제주도에 도착합니다. 무언가, 공기가 다른 느낌이랄까요. 제주공항에서 밖을 나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야자나무입니다. 따뜻한 남쪽 나라인 부산에서도 만나기 힘든 풍경이 낯선 섬인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보입니다. 인증샷을 남기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렌트카 셔틀버스에 몸을 싣습니다.
예전에 비해 대중교통으로 다니기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제주도는 여전히 렌트카 없이는 다니기 힘든 곳입니다. 특히 제가 가고자 했던 장소들과 숙소들 중에선 차 없이는 엄두조차 내기 힘든 곳들도 있었기에, 당연한 수순으로 뚜벅이보다는 렌트카를 빌리기로 했어요. 차를 수령하고 세팅을 하고 음악을 들으며 여행의 첫 장소인 '자구내 포구'로 향합니다.
자구내 포구 등대 쪽을 향하면 길가에 쭉 늘어선 마른오징어 가게가 있습니다. 외지에서 온 낯선 이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이모님에게 마른오징어(제주에서는 ‘준치’라고 한다네요)를 사고, 한 마리는 즉석에서 구워달라고 했습니다. 차에서 운전하는 동안에 간식으로 먹으니 꿀맛이더군요.
짧은 구경을 마치고 찾아간 곳은 ‘신창 풍차 해안도로’입니다. 바닷가 도로를 따라 늘어진 풍력발전소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해요. 주차공간에 차를 대고 산책로를 따라 진귀한 풍경을 눈과 카메라에 담아봅니다. 날씨가 좋아서 제주의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 검은 현무암, 하얀 풍력발전소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어요. 부산 바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제주만의 바다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장소였습니다.
제주 바다 탐험은 계속됩니다. 다음 행선지는 한림읍의 대표 바다인 ‘협재해수욕장’입니다. 높게 뜬 태양빛이 바다에 반사되어 눈이 부십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백사장을 잠시 걸었습니다. 주변에 고층빌딩으로 가득한 부산의 바다와는 확연히 다른, 고즈넉한 느낌과 분위기가 좋았어요. 지인에게 추천받은 협재해수욕장 근처 밥집 '안녕협재씨'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푸딩 가게인 '우무'에 들렀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얼그레이 푸딩 밖에 재고가 남아있지 않아 아쉬운 대로 사서 먹어봅니다. 구매한 지 10분 이내로 먹어야 물렁해지지 않고 제 맛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하네요. 캐릭터 그림이 너무 귀여워서 푸딩 포장 그대로 기념품으로 가지고 왔답니다.
해 질 녘이 돼서야 첫날 숙소인 '솔트(salt)'에 도착했습니다. '소금'이라는 이름답게 객실 자체가 하얀색으로 꾸며진 1인~2인 전용 숙소였어요. 경쟁이 치열했지만 운 좋게 예약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솔트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느낌의 공간입니다. TV도 없는 데다 하얗고 고요한 방 안에 네모나게 나 있는 창 밖으로는 애월의 바다가 한눈에 보입니다. 절벽에 위치한 감옥에 갇혀 하염없이 바다 건너를 꿈꾸는 죄수가 된 느낌이랄까요. 서쪽 바다로 저무는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귀에는 파도소리만이 들려오고, 시간은 서서히 흘러갑니다.
바깥이 완전히 어둑해지고 나서, 숙소 주변 구경을 나섰습니다. 낮 시간에 보는 제주 바다와 밤의 그것은 분위기가 달랐어요. 제주도는 공항 근처의 시내가 아닌 이상 저녁 7시 이후엔 거의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어딘가 쓸쓸한 밤의 풍경이었지만 혼자만의 여행에서는 오히려 밤의 침묵이 더 달갑게 다가왔습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1층의 카페 공간에서 첫날 여행을 복기해봅니다.
좋은 공기와 좋은 풍경을 보고, 그것들을 나의 내면에 새겨 넣는 것은 여행을 단순히 '좋은 것을 보고 온 행위'에 그치지 않고 '내가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하는 행위'가 될 수 있게끔 해줍니다. 여행하는 동안 당장에 느낀 것이 전혀 없더라도, 그것을 다시 되새김하는 과정에서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여행의 주제는 바뀌기도 하더라고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반짝이는 것들, 제가 취미로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에서는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브런치를 통해 쓰는 글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솜씨는 아니지만 여행기를 쓰려고 하는 까닭은 독자들에게 읽힘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도 물론 있겠지만 정말, 지극히 개인적으로 나 자신이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발전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 더 큽니다.
조금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덜컥 휴가를 쓰고 급하게 결정해서 온 제주도이지만, 첫날부터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곤히 자고 일어나면, 둘째 날의 제주도는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려줄까요. 얼른 잠을 청해야겠습니다.
- 제주 여행기 2편으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