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하동 여행기 1편에 이어...
산골의 저녁은 도시보다 빨리 찾아옵니다. 땅거미가 지는 한적한 도로를 따라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향합니다. 넓고 근사한 숙소를 잡을 수도 있었지만, 산 중턱에 위치한 ‘금향다원’을 최종 선택했습니다. 시골 민심으로 운영하는 숙소라는 후기들과, 조식이 매우 훌륭하다는 것. 해가 지고 나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외진 곳에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숙소에 도착하여 전화를 하니 사장님의 아들 분께서 웃으며 맞이해줍니다. 숙소에는 솔이(강아지)와 별이(고양이)가 있다고 해요. 비가 오는 탓인지 솔이는 만나지 못했고, 별이, 그리고 별이와 닮은 고양이들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숙소에는 저녁 시간에 운영하는 주막도 있다고 하지만, 낯을 가리는 저는 그런 자리가 매우 어색한 탓에 찾아가진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운전과 걷기를 반복한 탓인지, 높은 고도에서 맞이한 낮은 풍경에 취해서인지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눕자마자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둘째 날, 훌륭한 시골밥상으로 구성된 만족스러운 아침식사로 하루를 시작해봅니다. 인상이 좋으신 여자 사장님께서 직접 만드신 청국장을 내어주며 자세하게 설명도 해주셨어요. 어제 만났던 아들 분께서는 4월에 벡스코에서 열리는 ‘카페쇼’에 참석할 예정이라며 초대권을 나눠준다고 하셨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저도 한 장 받아두었습니다. 카페쇼에서 다시 두 분을 만나게 된다면 저를 알아봐 주실런지요.
10시쯤에 다시 숙소를 나서 본격적인 두 번째 날의 여행을 떠납니다. 숙소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매암제다원’을 가장 먼저 찾았습니다. 하동의 핫플레이스 중의 한 곳이라 그런지 오픈 시간에 맞춰 찾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어요. 인생샷을 찍을 수 있는 스팟도 있다고 하던데, 어쩐지 혼자서 그런 사진을 찍기는 민망했던지라, 아침 찬 공기와 함께 차를 마시고 길을 나서봅니다.
다음 일정은 ‘최참판댁’과 ‘박경리 문학관’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는 곳이자, 동명의 드라마 촬영지이기도 합니다. 입장료를 내고 언덕길을 올라가면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보이는 초가집들을 만날 수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박경리 문학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저는 아직 [토지]를 제대로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린 일부만 읽어봤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문학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곳을 찾았다는 사실이 어쩐지 부끄러워졌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을 다녀간 이상, 시간을 내어 읽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문학관을 나서 잠시 내려오면 최참판댁으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전 날과는 달리 비가 그치고 날씨가 좋아져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진달래며 동백, 벚꽃들로 가득한 한옥이 눈을 사로잡습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최참판댁 가운데에서 사물놀이패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실력이 매우 빼어나다고 보긴 어려웠지만, 사물놀이패 분들도, 관객들도 하나같이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우리는, 왜 가까이에 있는 행복을 일상 사이에서는 느끼기가 힘들까요. 시간을 내어 낯선 공간에 와야지만 얻을 수 있는 기분이 있습니다. 이곳의 사람들에겐 제가 다녀간 여행지들이 일상일 텐데, 같은 풍경을 보아도 느끼는 것은 왜 다른 걸까요. '부산'하면 떠오르는 관광지 중 하나인 남포동 근처에 사는 저에게, 남포동은 그저 집 근처 번화가일 뿐입니다. ‘익숙함’은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지만 동시에 ‘지루함’을 동반합니다. 일상을 탈피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아마도 지루함을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겠죠. 여행이 가져다주는 긴장과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어느덧 여행의 마지막 일정입니다. 가까운 곳에 모여 있는 지금까지의 장소들과 달리 하동 내에서도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삼성궁’을 향합니다. 삼성궁은 단군 이래의 홍익인간 정신을 계승하는 한국 선도(仙道)를 계승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한 시간여를 달려 도착하자, 마른하늘에 서늘한 바람이 불더니 이내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돌탑과 솟대 사이로 드러나는 연못들은 우리나라 어디에도 보기 어려운 진귀한 풍경이었습니다. 어쩌면 가장 한국적인 것을 이어오는 곳이 낯설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공간이었어요. 그래서 더욱 낯설게 남았으면 하는, 욕심이 드는 곳이랄까요.
다시, 저는 느린 사람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배우는 것이 느리고, 사람 사이에 부대끼는 방법을 깨치는 것이 느립니다. 일상의 지루함을 견디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도 사실은 오래되지 않았어요. 혼자 하는 여행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겐 가장 특별한 ‘낯섦’이에요. 많은 것들을 눈에, 귀에, 손에 담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걸음은 어쩐지 가볍습니다. 비일상의 짧은 순간에서 깨달은 것들을 일상에 적용해보면, 생각보다 지루하지도 않고 익숙하지도 않은 세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는 요즘 출근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닙니다. 퇴근 후 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골목을 탐방해보고 있어요. 그러고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와 같은 생각이 들게 하는 공간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얻었습니다. 일상을 여행하듯 살아가는 방법 하나 정도를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하동을 느리게 걸으며 느낀 것들은 열흘 정도가 지난 지금에도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아요. ‘느리게 걸어도 괜찮아’ 같은 위로가 아닌, ‘여기선 다들 느리게 걸어’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혼자 하는 여행이었지만 어쩐지 이 고요한 산촌이 나와 함께 걸어주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요. 계절이 변하고 다시 저의 박자를 잊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언젠가는 다시 하동을 찾게 될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