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필록 Mar 30. 2021

슬로 시티, 하동 #1

느리다고 늦는 것은 아니다

저는 느린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느리다는 의미도 물론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그것보다는 마음의 속도에 비해 그것을 이뤄나가는 실행의 속도가 느린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것들도 많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것들을 해야 하는지도 머릿속에 있지만 그것들을 해나갈 행동력이 부족하다고 할까요. 천성이 게으른 탓에 목표에 닿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지만, 그래도 올해는 버킷리스트를 적고, 결과야 어찌 됐든 그것들을 하나씩 해나가보려고 합니다. 3월에 계획한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하동 여행을 지난 주말(3/20~3/21)에 다녀왔습니다.


하동으로 향하는 첫날에는 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예년보다 빠른 벚꽃 개화시기가 맞물려 있어 비가 온다는데 가야 할지 살짝 망설이기도 했지만,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좋은 것이 여행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차에 시동을 걸고, 고속도로에 올려봅니다.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첫 번째 장소는 하동읍내에 자리한 자그마한 공원인 ‘하동공원’입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동네 공원 느낌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좋았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아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배경 삼아 산책을 할 수 있었거든요.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낮은 시골마을의 풍경과, 꽃을 틔우기 시작한 벚꽃, 울창한 대나무 숲을 혼자 걸으며, 비로소 내가 낯선 공간에 왔음을 느꼈습니다. 제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니까요.


하동공원의 대숲(좌)와 송림공원의 정자(우), 비가 와서 더욱 운치있는 산책


하동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섬진강을 끼고 있는 '송림공원'이 있습니다. 다리 하나를 건너면 마주하고 있는 곳은 전남 광양이라고 합니다. 경상남도의 서쪽 끝에 와 있는 셈이지요. 다음 일정이 있는 탓에 오랫동안 머물지는 못했지만, 늙은 소나무들 사이에 자리한 정자 사진을 남기고 발걸음을 다시 옮겨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동은 경상남도의 서쪽 끝에 자리한 고장입니다. 서북쪽으로는 구례군, 서남쪽으로는 광양시와 인접하고 있지요. 이제부터 찾아가려 하는 '화개장터'는 동명의 노래에서 알 수 있듯 지리산 자락에서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만나 5일장이 열리던 곳입니다. 지리산에서 흘러나온 화개천이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곳에 위치한 곳에는 지금도 각종 약재들이며 특산품을 판매하는 특별한 장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슬슬 점심시간이 되어 '하동에 왔으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먹어봐라'고 지인들이 추천해준 재첩국 한 상을 먹었습니다. 원산지에서 먹는 맛이라 그런 건지 여행의 기분 탓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부산에서 먹던 맛보다는 특별한 점심식사였습니다.


천천히 담고 감각에 집중했던 시간들


화개장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십리벚꽃길'도 잠시 다녀왔습니다. 말 그대로 십리 정도의 길가에 벚꽃터널이 활짝 피어있는 공간입니다.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수많은 벚꽃들을 향해  핸드폰이며 카메라를 내밉니다. 저도 그 사이에서 사진을 찍다 문득, 이번 여행으로 '슬로 시티(Slow City)'를 표방하는 하동을 온 까닭을 깨달았어요. 꽃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듯, 이곳에서 나도 잠시 일상을 멈추고 싶었구나, 하고 말이죠.


다시 화개장터로 가는 길에 '쌍계명차'에 들러 우전 녹차를 마셔봅니다. 다기에 따뜻한 물을 담아 충분히 우러난 녹차를 천천히 목으로 넘기며 맛을 느껴봤어요. 목이 말라 마시는 차가 아닌, '마시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려 노력해봤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느림'이 주제인 것 같으니까요. 적당히 따뜻한 녹차의 온도, 꽃향기가 살짝 났던 찻잎 냄새, 끝이 살짝 떫은 녹차 특유의 맛까지, 비에 젖어 조금은 진해진 창 밖의 풍경처럼 모든 감각들이 조금은 진득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때로는 목표가 분명한 것이 확실한 동기를 부여해주기도 하겠지만, 무의식적으로 지나쳐버리는 하나하나의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것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목표는 사람을 좌절하게 만드는 법이니까요. 느리더라도 한 걸음, 그 순간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어쩌면 지금의 나에겐 맞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죠.


첫째 날의 마지막 장소인 '스타웨이 하동'으로 다시 이동해봅니다. 지리산 자락에 위치해 전망대에서 보는 탁 트인 하동의 모습이 인상적인 곳입니다. 궂은 날씨 탓에 먼 곳까지 보이진 않았지만, 산 정상에 올랐을 때와 비슷한 쾌감이 들었어요. 내가 아등바등 살아가려 애쓰는 공간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기분이랄까요. 그리고 나면 무언가 조금은 안심이 되더라고요. '내가 그래도 아직은 아름다움이 사라지지 않은 곳에서, 나쁘지 않게 살아가고 있구나.' 같은, 그런 기분이요. 그리고 가끔은 이렇게 가던 길을 멈추고 쉬어가도 되겠구나. 아니, 쉬어가는 게 맞는구나. 하고 깨닫게 됐습니다.


구름이 잔뜩 낀 궂은 날씨였지만 그래도 괜찮은,


느린 사람은 뒤쳐진다고 배워왔어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고 바뀌는 작금의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제가 최근에 깨닫게 된 것 한 가지가 있다면, 느리다고 늦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실제로 회사 동료 중에 한 분은 늦은 나이에 입사를 해서 일손도 느리고 업무 숙지도 늦어서 팀원 사이에서 걱정거리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분이 회사 고과 평가에서 최우수 등급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어요. 그분의 질문이 간혹 답답할 때가 있어 짜증 섞인 대답을 했던 저 자신이 무척 부끄러워졌습니다. 나라고 뭐 잘난 것은 없는데, 나라고 결코 빠른 사람은 아닌데 말이에요. 회사 생활에 있어 제가 한 번도 해내지 못한 최우수 등급의 성과를 낸 것은, 느리지만 결코 늦지 않은 그 사람이 스스로의 박자를 믿고 걸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리듬이 있습니다. 남의 눈치를 시도 때도 없이 봐야만 하는 각박한 직장 생활에서도, 자기 자신의 박자 감각을 잊지 않는 것. 느리더라도 결코 조급해하지 않는 것 말입니다.



- 하동 여행기 2편으로 계속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골목 여행의 도시, 오사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