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사이
지난 연차 때 다녀온 시립미술관 나들이 이후 주말엔 현대미술관에 다녀오겠노라고 결심을 했던 차였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에 컨디션이 좋지 않은 데다 흐린 날씨에 멍한 상태에서 표를 끊고, 입장.
현대미술관은 지난 7월 이후 두 번째 방문인데,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하향됨에 따라, 지난번처럼 미리 예약을 해야만 입장이 가능하지는 않았고, 현재는 '부산비엔날레' 기간으로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라는 타이틀로 현대미술관과 영도, 중앙동 일대에서 전시가 진행중이라고 한다.
1층과 2층에서 각각 다른 컨셉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국내 작가 뿐 아니라 해외 작가들도 많이 참여한 것 같았다. 지난 방문 때도 느꼈지만, 현대미술은 이해하려고 하는 순간부터 오히려 난해해지는 것 같다. 일부러 작품설명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감상했지만, 의도와 주제를 파악하기가 힘들어, 그냥 내가 받아들이는 그대로 오해하면서 보기로 했다.
설치미술과 비디오아트, 일반적인 그림이지만 부여되는 의미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있는 작품들. 내가 이해한(오해한) 현대미술은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를 지우는 데에 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쓰러진 동상을 전시하고 관람객들이 그것을 일으켜 세우는 행위까지도 작품에 포함된다고 하니, 관람객과 작품이 '주체'과 '객체'가 아닌, 내가 보는 그 행위도 작품인 셈이다.
오랫동안 인간의 뇌를 지배해왔던 이분법적 사고를 미술작품에서도 탈피하는 시도가 매우 신선했다. 그리고 그 방식도 미술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던지, 조각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닌,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에 한 번 더 놀랐다. 창작을 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의 입장에서, 어쩐지 내가 시대에 뒤쳐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너무 순수하고 완벽한 글쓰기만을 추구해온 것을 아니었나 하는 반성도 함께.
그리고 문득 내가 이 작품들을 본 소감을 온라인 포스팅을 하려 사진을 찍는 행위조차도, 작품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음을 밝힌다. 내가 본 시선과 사진으로 보여지는 시선이 다르고, 내가 포스팅한 글을 보는 독자들의 시선이 또한 다를 것이므로, 거기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셈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핫한 밈이라던지, 2차 창작물들도 큰 의미에서 보자면 현대미술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시를 보고 머리를 식힐 겸 을숙도 생태공원을 걸었다. 현대미술관 자체가 을숙도공원 가운데 지어진 곳이라, 산책 삼아서 천천히 걸어서 둘러본다. 가족단위, 연인단위로 나들이 온 사람들 사이로 코로나로 인해 핑크뮬리는 잘리고 갈대숲은 예약제로만 운영되는 현수막을 보니 씁쓸해졌다. 1년 중에 가장 하늘 색이 예쁠 시기에도 마음 한 켠에 걱정을 안고 순간을 즐겨야 한다니.
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 집으로 오면서 '경계'라는 것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나는 내가 이해한다고 여겼던 것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실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은 아닐까 하는 생각. 그리고 내가 가장 많이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스스로에 대한 편견부터, 그 경계를 허물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나를 오해하며 살아가겠구나, 하는 데까지 생각이 닿았다.
한때는 글을 쓰는 것이 정말로 재미있었고, 나 자신이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좌절과 오만, 천성적인 게으름 때문에 나는 결국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쓰지 않으니 쓸 수 없게 되었고, 쓰지 않아도 세상은 잘 굴러가고 있었기에, 쓸 필요가 없었다.
불과 며칠 전부터 나는 조심스레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용이 중구난방이고 엉망인 글이 될 것이 분명하다. 허나, 분명한 것은 이제 누군가를 위하여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이 가둬왔던 내 자신의 틀을 깨고 싶은 마음으로 쓴다.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음을 깨닫자, 동기부여가 생긴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일단 쓰고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