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 천천히 | 아이라는 숲
엄마아빠는 나갈 준비를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빨리빨리 하라고 하신다.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가면 같은 상황에서도 늘 천천히 하라고 하신다.
아이는 중간에 끼어 빨리빨리 해야 할지 천천히 해야 할지 헷갈려하다 엄마,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두 같이 있는 공간에서 삶의 속도에 대한 지혜를 얻는다.
도서관에서 다섯 살 예니에게 읽어주었다. '빨리빨리'와 '천천히'가 매우 많이 반복되는 책이라, 예니는 때로는 빨리, 때로는 천천히 읽어주는 엄마의 책 읽기 세상에 푹 빠져 책을 보았다.
책을 덮고 나는 물었다.
"우리 강아지는 빨리빨리가 좋아 천천히가 좋아?"
예니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빨리빨리"
나는 우리 느림보 예니가 뭐든 빨리 해내고 싶어서 그러나 싶어 그 마음이 정말 귀여웠다. 그리고 이유를 물었다. 왜 빨리빨리가 좋으냐고.
"천천히 하면 엄마가 화나니까."
아팠다. 가슴이 참 아팠다. 엄마가 화'내니까'도 아니고, 화'나니까'라니. 엄마가 화내서 내 기분이 나빠서라기보다, 사랑하는 엄마를 화나게 하는 일이니까 천천히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눈물이 왈칵 났다.
"엄마는 네가 빨리빨리 해도, 천천히 해도 너를 항상 사랑해. 알지?"라는 말로 둘러대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그저, 이 아이가 천천히 한다고 해서 빨리 하라고 재촉하지 말아야지, 화내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먹어보는 것밖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일이 있었던 건 한 달 전쯤의 일이다. 그동안 내가 아이가 느릿느릿한다고 해서 빨리빨리 하라고 하지 않았을까? 화내지 않았을까?
.........
이렇게 그날의 기록을 하면서 또 마음먹어보지만 또 내겠지.. 또 지르겠지..
그래도 이렇게 마주하기 무서워도 아이의 감정과 생각을 물어봐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엄마가 되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이들이 자신을 알아가게 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우리 딸은 뭐 할 때 가장 행복해? 어떨 때 즐거운 마음이 들어?"라는 질문을 자주 한다. 그리고 어떨 때 슬픈 마음이 드는지, 엄마가 화를 내면 어떤 기분이 드냐는 떨리는 질문도 가끔 한다.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듣는 그 사이. 그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긴장감이 감돈다. 그리고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해지는, 가슴에 비수를 꽂는 대답들이 나온다.
다음은 이진민의 <아이라는 숲>의 일부분이다. 독일에 살았을 때 아이들이 엄마에게 했던 말이다.
"엄마는 크잖아. 엄마는 엘턴(Eltern, 부모)이잖아."
"응."
"나랑 이음이는 킨트(Kind, 아이)잖아. 우리는 작잖아."
"응."
"그래서, 엄마가 큰데 엄마가 무섭게 말하면 안 돼. 우리는 작으니까 무서워."
이 부분을 읽고 나는 가슴이 아렸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엄마 아빠는 저 위에 있는데 얼마나 위압감을 느낄까?(남편은 아이들에게 그렇게 화를 안 내니까 내 얘기만 해야겠다.)
나는 어깨도 광활하고 눈도 큰데, 그런 내가 눈을 부라리며 고압적으로 아이들에게 분노를 날리면 아이들은 얼마나 무서울까?(어깨가 좁고 눈이 작은 엄마는 덜 무섭다는 얘기는 아니다.)
더구나 그렇게 커다란 사람에게 나의 존재를 위탁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는 정말 내가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 커다랗고 중요한 사람이 말로, 혹은 침묵으로 상처를 준다면 작은 아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한 문장 한 문장 모두 가슴을 후벼 파는 이진민 작가의 글에 마음이 매우 불편해진다. 불편함을 마주해야 성장한다. 내가 꿈꾸는 ‘좋은 어른’이 거저 되는 것은 아니니.
언젠가부터 나를 불편하게 하는 책들을 피하지 않고 좋아하게 되었다. 독서라는 걸 제대로 하고 나서 얼마 안 됐던 시절에는 깊은 독서가 나를 불편하게 하는 행위라는 걸 알고 회피하려고도 했으니 나 참 많이 성숙해졌다.
사랑하는 우리 막내 강아지, 엄마에게 두 번째로 찾아온 소중한 우리 딸아,
너는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텐데, 너의 속도를 엄마에게 맞추길 바라며 빨리빨리 하라고 재촉했던 지난날들에 대해 엄마가 진심으로 사과해.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또 그러지 않을 엄마가 아니란 건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너네 아빠도 알고 하늘도 알 테지만, 엄마는 이렇게 생각 하나, 기록 하나를 쌓으며 점점 좋은 사람이 되고 있다고 믿어.
그런데 이렇게 적고 보니, 너에게는 빨리빨리를 강요했으면서 엄마는 천천히 나아지겠다고 하고 있다는 걸 또 깨닫네.
우리 서로의 속도를 존중해 주는 사이가 되자. 아직 한없이 연약하고 작은 존재인 너에게 엄마가 더 맞춰야 하는 건 당연한 사실이겠지.
사랑해. 엄마의 마지막 사랑 우리 똥강아지.
(세 번째 아이는 아빠가 반대해서 네가 마지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