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의 관계 #1
평생을 바쳐 속이려는 대상이 과연 누굴까?
우리는 곧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것이 하얀색이든 검은색이든.
그러니 타인을 속이는 일은 쉬운 일이다.
하루에도 알게 모르게 하는 거짓이 삶 속에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담,
속임의 대상이 과연 눈으로 보이는 실체일까?
이런 질문은 좀 곤란하게 만든다.
대상이 없는데 왜 속이려 하겠는가? 뭐 하러?
속이는 건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한 자발적 혹은 간접적 행동 아닌가?
대가 없는 수고를 하는 건 흔치 않으니까 말이다.
질문을 바꿔서.
누굴 가장 많이 속일까? 가족? 지인? 직장동료? 모두 밖으로 향하는 관계들 뿐이다. 타인만 속일까?
무척 질문이 많아진다.
이 질문은 나로 하여금 하나의 길로 이끈다.
모든 속임수의 시작점과 끝은 바로 '나'라는 점이다.
어쩌면 우리는 상대에게 하는 거짓말 보다 '나'에게 하는 거짓말이 더 많은지 모른다.
악독하리만치 지속적으로 오랜 세월 스스로를 속여 왔기에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뿐.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차곡차곡 쌓인 거짓은 언젠가는 스스로 진실이라 착각하게 만든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 하는 것을 싫어해"
"내가 좋아하는 건~"
하고 자신 있게 말한다.
나이 든 어른일수록.
이성이 생기고 사고가 발달하면서 사람은 모름지기 '거짓'을 다루는 기묘한 기술마저 터득하게 된다. 어른일수록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속일 수 있는 방법을 자연스레 발전시키니 말이다.
처음엔 아예 거짓된 사실을 말한다. 쌩 거짓말. 그러다 진실과 거짓을 섞는 기묘한 기술을 터득하게 되고. 마침내는 적절한 편집 기술을 통해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타인이 듣기에 전혀 다른 내용으로 유도하는 능력까지 발휘하게 된다.
이런 고난이도의 기술이 누구를 향하는 걸까?
쉬이 답하기 어렵다.
누군가 나에게,
"싫어하는 걸 언제 해보셨나요? 몇 번 해보셨죠?"
라고 물으면 무어라 답할지. 누군가는 너무 쉽게 답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너무 어려워할 것이다.
싫다고 하는 것들, 얼마나 하고 싫다고 결론을 내린 걸까?
한 두 번의 짧고도 강렬한 경험이 고작 이거나 혹은 그조차도 해보지 않은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선입견에서 시작된 생각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미리 예단해서 행동하기를 멈추게 했을 것이다. 그중에는 "다시는 하지 않을 거야"라고 진저리 친 경험 두어 번 정도이고. 다시는 시도조차 하기 싫을 정도의 한 두 번의 경험, 그것이 '나'의 기호로 굳어진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이 해본 것을 마치 자신이 경험한 것인 양 이야기하는 것들도 허다하다.
남의 경험이 내 것이 되고, 남의 것이 내 것인 양 속이거나 포장되는 일은 부지기수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나는 수태 들어온 말이 있다.
"에이~ 선생님 해보지 않아도 알아요. 저는 그런 걸 싫어하거든요."
"제가 지난번에 한번 해봤는데 전혀 즐겁지 않았어요."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가격 비교 사이트를 통해 신중의 신중을 가하기 마련인데,
자신의 삶에서 선택은 매우 단호하고도 성급하게 한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모른 채.
자신이 얼마나 협소한 사고와 경험을 가진 지도 모른 채.
현재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기회를 줘보자.
어쩌면 자신이 지금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들이 몇 번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졌는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서 만들어진 것인지.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건, 결코 한 번의 경험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란 것이다.
좋았던 경험과 싫었던 경험 그리고 어떠한 감정도 확고하게 느끼지 못했을 수많은 경험들 중 어느 한순간 강렬한 긍정적 감정이 그 순간 스쳤을 것이다.
몸에 흐르는 전류 같은 그 무언가.
머리를 꽝하고 뒤흔드는 강렬함.
우와 하고 탄성을 자아내는 감각들.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한번 더'의 욕망을 세웠을 것이고 그 욕망은 결국 한 번으로 그치지 않도록 부채질 했을 것이다.
마침내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저장된다.
긍정적인 감정의 레이어드.
이렇게 '나'가 만들어진다.
좋고 싫고의 기호는 '나'를 형성한다. 기호는 강렬한 감정을 기반한다.
감정.
어렵고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공기처럼 숨 쉬는 모든 순간 감정에 휩싸인다.
느끼는 모든 감정은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토대다.
이놈의 감정이 얼마나 곳곳에 있는지는 차차 풀어갈 거다. 우선은 속임수와 관련된 녀석만 파보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로 매번 긍정적인 감정만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강렬함은 내 몸에, 마음에, 정신에 각인되어 '나'를 형성한다.
감정은 간단하지 않다.
10분 안에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 하나로 정의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길거리에서 첫사랑과 마주쳤다고 생각해 봐라.
단지 '좋다', '싫다'라는 식의 감정만 말할 수 있겠는지.
그 찰나의 순간에도 '두근거림', '당혹감', '반가움', '궁금함', '긴장감' 등의 감정이 한꺼번에 혹은 여러 번에 걸쳐서 스쳐 지나가면서 쏟아지지 않겠는가.
감정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좀 더 아픈 감정,
다신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을 피하기 위해.
어쩌면 자신을 먼저 속이는지 모르겠다.
그래야,
감정을 마주할지도 모르는 행동을 그럴듯하게 피해 갈 명분이 생기게 되니까.
뼈 아프게, 처절하게 고통을 혹은 환희를 안겨준 감정일수록 결말을 빠르게 예측해 버리기 일쑤다.
그래야 피하든, 숨든, 더 하든 행동할 수 있으니까.
일단,
대면하기 싫은 감정은 스스로를 '거짓'으로 안심시킨다.
"너는 결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아"하고 말이다. 회피할 명분은 확실히 만들어준다.
이 얼마나 달콤한 속삭임인가.
마치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다.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꺼린다면,
자신은 결코 스스로에게 '아군'이 아니라 '거짓'만 알려주는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거짓'은 피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고통스럽지 않다고,
쓰나미와 같은 고통이 아니어도 화들짝 놀라며 일단 피하기부터 한다.
크든 작든 고통은 아프니까.
스스로에게 '거짓'을 고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자.
'거짓'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가 되게 한다.
도망만 다니는 '비겁한 자'가 되게 만든다.
언제까지 도망갈 수 있을까.
결국은 다시 제자리, '나'로 돌아온다. 마음의 고통은 신체의 고통으로 치환되고 변질된다. 그러면 좀 더 수월해진다. 이 병원 저 병원 다녀도 원인을 알 수 없고 병명을 찾을 수 없게 되어 끝끝내 의사로부터 "심리적인 문제 같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기까지 버티기로 일관하면서.
신체든, 정신적이든, 혹은 병리적인 것이든지 간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경고등이 켜진다.
이제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막다른 골목까지 왔을 때 이미 '거짓'은 어마어마한 산처럼 거대한 괴물이 되어있게 된다.
"감정을 느끼느니 몸이 아픈 게 나아"라는 이야긴 이제 그만하자.
그렇게 두려운 건 아니다. 감정도 결국엔 나니까.
어마무시한 괴물을 상대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지나친 두려움은 거짓의 산물이다.
절대로 장담컨대, 감정은 거대한 존재가 아니다.
더 이상 감정 때문에 자신을 속이지 말자.
자전거를 배울 때 뒤에서 잡아주고 '조금만 더'라고 외쳐주는 이가 있다면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혼자가 두렵다면 '함께' 마주하면 된다.
그렇게 서서히 감정의 실체를 만나보자.
자전거를 잘 타기까지 얼마나 많은 엉덩방아와 무릎이 까지는지.
자전거를 잘 타기까지의 고통이 결코 가볍다 할 수 있을까?
결국에는 자전거를 잘 타게 되는 것처럼.
감정은 충분히 다룰 수 있다.
겁내지 말자. 너와 나. 우리 함께. 다 같이.
오랫동안 글을 쓸 엄두조차 하지 않다가 이전에 끄적이던 글을 다시 정리해 보려 합니다. 발로 쓰는 것처럼 마음과 다르게 써내려 져 가는 글을 보며. 다시 한번 마음과 생각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알게 됩니다. 다시 쓰게 되면서 그 끝에 어떤 것이 기다릴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엉켜있던 것이 풀어지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억지스레 해봅니다. 매주가 될지, 매달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2023년 10월 25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