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이 긴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전철이 흔들거릴 때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몸도 미세하게 좌우로 움직였다. 불교에서는 스치는 인연도 전생에서 억수로 많이 마주쳐야 한다고 했다. 가서 말을 걸어볼까. ‘전생에서 저흰 무슨 관계였을까요? 반갑네요. 저는 대중철학자 유성범입니다’라는 영화 같은 대사를 날려볼까.
내 앞에는 한 청년이 앉았다. 평범하게 생겼고, 노란 웜톤 얼굴에 턱이 날렵했다. 그는 나와 일면식도 없으나, 열차를 함께 탄 사이인 것이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어디인지도 모르는 긴 어둠 속에서 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번 역은 성신여대입구… 내리실 분은…”
4호선 열차는 서울에서 가장 빠르다고 한다. 전 역 평균 40.1km/h 가 나온다. 나는 4호선이 좋다. 서울을 위아래로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디든지 손쉽게 갈아탈 수 있다. 속도만을 추구하다 보니 뭔가가 이상해졌다. 효율을 좋아하는 내 인생은 도무지 빠르지 않아 보였다. 전철은 빠르게 목적지로 가주기만 할 뿐, 나의 속도와는 별개였다.
지하철에서 한 번도 남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없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는지 모른다. 다만 같은 어둠을 뚫고 갈 뿐이다. 우리는 서로를 해치지 않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한다. 자신만의 길을 가는 한 상대방과 마주한다는 것은 득 보단 실이 크다고 여긴다.
인생이 추구하는 바가 행복과 여유, 쉼, 그리고 관계라면, 이 지하철은 잘못됐다. 빠를수록 돌아가는 게 아니라, 빠를수록 멈춰버려야 한다. 어딘가에 부딪혀서 하루정도는 지하철에서 숙식하며 옆사람과 투닥거려야 한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그 방향을 나눌 수 있는 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