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리할 때
난 겨울이 되면 딸아이 방에서 잔다. 우리 집에서 가장 따뜻한 방이라서다. 북향 창밖으로 커다란 벚나무가 있어 봄에 꽃이 필 때면 환장하게 이쁘다. 꽃이 눈보라처럼 휘날린 뒤에 나무는 잎을 풍성하게 달아 그늘을 만든다. 덕분에 여름에는 제일 시원한 방이 된다. 방바닥에 몸을 대고 누워 뒹굴뒹굴 굴러다니면서 책을 읽으면 참 좋다. 깜빡 졸면 매미가 깨워준다.
그 방은 딸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중학교 2학년에 머물러 있다. 가끔 한국에 올 때 지내기도 해서 조금씩 흔적이 보태지기는 했겠지만 대부분은 한참 전의 것들이다. 교과서와 참고서, 악기들, 오래된 필기구, 수첩, 노트, 머리핀, 파일들, 인형, 영수증, 티켓, 어딘가의 기념품들. 그때는 소중했겠지만 지금은 기억조차 못할 수도 있는 물건들이다. 10년이 넘도록 쉽게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싶을 만큼 좋아했던 것들이겠지 싶다.
딸아이 방에서 지내다 보니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여러 해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잘 있다 갑자기 그런다. 내 마음에서 딸의 어린 시절을 떠나보낼 때가 되었나 보다. 내가 다 치우고 싶지만 딸에게 자신의 지난 시간과 이별할 준비가 되었는지 물어보아야겠다. 내 눈에 보이는 것 말고 아이만 아는 이야기가 있을지 모르는 자기만의 방을 정리할 기회를 주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어릴 때 종이 인형을 엄청 좋아했다. A3 정도 되는 도톰한 종이에 사람의 몸과 그 몸에 걸칠 수 있는 옷과 소품들이 그려진 장난감이다. 옷은 사람 몸에 걸칠 수 있도록 어깨에 뿔 같은 것이 달려있다. 이 부분은 가위로 오리기가 어렵다. 자주 접었다 폈다 해야 해서 찢어지기 쉽다. 새것일 때부터 뒷면에 얇은 종이나 투명 테이프를 붙여 보강해 두기도 했다. 그렇게 아끼면서 모은 종이 인형과 옷들이 라면 상자에 가득했고 내 보물 1호였다.
나중에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나 스스로 그 인형들을 추려 버릴 것은 버린 후 옆집 아이에게 주었다고, 중학교 가서도 그걸 갖고 놀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는데 참 신통방통했다고 하셨다. 나에게 인형들을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지 않은 걸 보면 준비가 충분히 된 상태에서 헤어졌는가 보다. 이런 기억들 때문에 딸에게도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과 잘 이별할 기회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