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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말

by philosophers needlework Mar 11. 2025

 일기를 쓸 때 먼저 날짜를 쓴다는 점이 참 좋다. 오늘 이 시간을 짚고 가는 느낌이 든다. 정해진 출근 시간이 없는 생활을 하다 오늘이 며칠이지, 무슨 요일이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면 좀 비참해지는 감이 있다. 그럴 때 일기를 쓰면 날짜부터 쓰기 시작하고 그래서 날짜 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면에서는 일기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쓰는 것이 좋겠다.

 요새 봄바람이 불었는지 책상 가까이에서 잠을 자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면 워드 파일을 열어 이것저것 써놓은 것들을 읽다가 쓰다가 한다. 갑자기 딸이 사 준 랩탑을 가치 있게 써야겠다는 다짐을 새로고침해 본다.  

 딸이 중학생일 때 내 생일에 선물로 노트를 사 준 적이 있다. 그 노트는 하드커버에 북넘버가 바코드로 프린트되어 있어서 책처럼 생겼다. 표지를 넘겨 보니 여백만 있었다. 말 그대로 공책(空冊)이다. 속표지까지 있다. 표지 안쪽에 메모가 있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분께 이 일기장을 드립니다. 소중한 추억들과 가치 있는 생각들이 이곳에 채워지길 바랍니다.”라고 적혀 있다. 너무나 무서운 말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 공책을 쓰지 못했다. 가치 있는 말들을 생산할 수가 없어서다. 드디어 뭘 쓰기 시작했는데 내 말이 아니다. 그런데 내 말을 대신했나 싶게 내 마음과 딱 들어맞는 책을 발견하고 책 속의 문장들을 베껴 썼으니 아주 내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꼼꼼하게 고르고 손으로 한 자 한 자 베끼며 문장을 꼭꼭 씹다 보면 단물도 쓴물도 나오고 나를 살찌우고 풍요롭게 때로는 아프게 하겠지. 같은 물을 마시고 뱀은 독을 만들고 벌은 꿀을 만든다고 한다. 같은 시간을 살며 꿀과 향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악취는 풍기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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