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을 읽고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은 작가의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은 열네 살 소년 죄르지가 학교에 결석하게 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소년은 노동 봉사에 소집되어 떠나는 아빠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 아빠가 가게를 직원 명의로 바꾸고 귀중품을 맡기는 것을 보면 다시 돌아오기가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죄르지 케비슈테르시는 떠나는 아빠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빠가 떠나고 죄르지는 노동 수용소에 가기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정유공장 재건을 위한 노동력으로 동원된다. 평소처럼 출근하다 버스에서 잡혀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어디로 왜 가는지 모르는 채로 매우 불안하고 불편한 길에 오른다. 지루함을 견디고 도착한 곳은 아우슈비츠였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는 노동을 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사람들을 나누는 학살 수용소였다. 이곳에서 적합 판정을 받으면 다른 근로 수용소로 가서 죽을 때까지 강제 노역을 해야 하고 부적합자는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하고 단체로 태워졌다. 죄르지는 열여섯 살이라고 속이고 근로 수용소로 갈 수 있었다.
소년은 수용소에서의 노동과 부상을 견디고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일 년여 만에 고향 부다페스트에 돌아왔지만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독일 수용소에서 죽었고 새엄마는 아빠가 가게를 맡겼던 직원과 재혼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죄르지가 엄마를 만나러 발걸음을 옮기며 소설은 끝이 난다.
‘홀로코스트(The Holocaust)’의 어원은 고전 그리스어로 ‘번제(燔祭)’를 뜻하는 ‘홀로카우스토스(ὁλόκαυστος)’로, 제물을 불에 태워 그 연기로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의미한다. 영어에서 홀로코스트를 유대인 대학살이란 의미로 쓸 때는 앞에 정관사 ‘the’를 붙여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임레 케르테스는 《운명》을 13년 동안 써 1973년에 완성했다. 진부한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고 홀대받다 1975년에 겨우 출판되었으나 책이 팔리지 않았다.
작가는 2002년 노벨문학상을 받기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음에도 쓸 수밖에 없었다. 임레 케르테스에게 글쓰기는 자신이 누구인지, 왜 수용소에 가야했는지, 답을 찾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80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홀로코스트와 관련한 작품이 만들어지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왜’에 대한 답을 아직 찾지 못했고 답을 찾는 과정에서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 다시 우리를 파괴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 같다.
《운명》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자의 증언이자 고발이기도 하다. 하지만 매우 덤덤하게 그려졌다. 운명은 고통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소설의 끝에서 소년은 사람들은 왜 힘든 일에 대해서만 묻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심지어 행복했다고까지 말한다. 고통 속에서 꺼내는 행복이기에 훨씬 값어치 있어 보이지만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살라는 메시지로 읽고 싶지는 않다. 깊은 고통을 겪은 자가 얻어낸 운명과 고통과 행복에 대한 통찰을 담담하게 이해하고 싶다. 고통과 행복의 무게를 재지 않고 내 앞에 놓인 길을 묵묵히 걷고 싶다.
나는 힘을 모으기 위해 올 때 앉았던 벤치 옆에 일 분 정도 멈춰서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점점 멀어지고 점점 넓어져 보이다가 이내 곧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푸른 언덕 위를 지나가는 양털구름은 보랏빛을 띠고 하늘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변이 뭔가 좀 바뀐 듯했다. 교통량이 줄어들고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느려졌으며 목소리가 나지막해지고 시선도 부드러워지고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이 시간대는 수용소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한 특별한 시간이었다. 지금 여기에서도 그 느낌이 전해졌다. 뭔가 섬세하고 고통스럽고 허무한 느낌이 찾아왔는데 그것은 바로 향수였다. 모든 것이 일시에 생생해지고 내 안에 있던 모든 것이 새록새록 피어오르고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사소한 기억들이 전율을 느끼게 했다. 그렇다. 어찌 보면 그곳에서의 삶이 더 순수하고 단순했다. 수용소에서의 모든 일이 다시 떠올랐다. 또 그곳에서는 별로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과 나의 관념과 실존 속에서만 존재를 증명해 주는 번디 치트롬, 피에트하, 보후시, 의사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떠올랐다. 나는 처음으로 약간의 원망 어린 마음과 애정 어린 반감으로 그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계속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논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나는 잘 안다. 석양으로 물든 아늑한 광장과, 수없이 비바람을 맞아 왔지만 여전히 수천 가지 기대로 충만한 거리들을 둘러보며 내 안에서 하나의 각오가 생겨나더니 그것이 점점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도저히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삶을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였다.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를 보면 정말 기뻐하실 것이다. 불쌍한 어머니. 내 기억에 어머니는 내가 엔지니어나 의사 아니면 그와 비슷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나는 틀림없이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극복하지 못할 불가능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아갈 길 저만치에 행복이 피해 갈 수 없는 덫처럼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 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내게 수용소에서의 역경과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만 묻는다. 나에게는 이러한 경험들이 가장 기억할 만한 일들로 남아 있는데 말이다. 그래, 사람들이 나중에 묻는다면 그때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283~285쪽
《운명》임레 케르테스 글, 유진일 옮김, 민음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