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프장에서 온 쌀 한 포
성수기의 일요일 수도권 골프장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린피만 30만 원 내외, 기름값과 통행료, 캐디피와 카트비, 식사비까지 더하면 40만 원에서 50만 원까지 든다. 비싼 운동이다.
남편의 골프 모임은 고등학교 동기들과 매월 한 번씩 갖는 정기 행사이다. 스무 명 남짓한 회원들은 동기 부여가 되라며 매번 시상식을 연다. 타수가 가장 적은 우승자부터 티샷을 홀컵에 가장 가까이 붙인 니어리스트, 가장 멀리 보낸 롱기스트까지, 여러 명목으로 상을 준다. 자기들끼리 돈을 내고 또 자기들끼리 나누어 갖는 상이지만, 그래도 즐거운 모양으로 꾸준히 해오고 있다. 집으로 돌아갈 때 빈손으로는 안 되는 게 남자들의 체면인 모양이다.
가끔은 회원 중 누군가가 협찬이라며 상품을 내놓기도 한다. 골프공, 골프 모자, 선크림, 탁상용 스탠드, 셔츠, 텀블러, 수건 등 이런저런 물건들을 가져온다. 개수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나누는데, "니 해라" 하며 양보하기도 하고, 정 곤란하면 가위바위보로 결정한다. 참 정이 넘치는 친구들이다.
마침 집에 쌀이 떨어져서 사야 했다. 식료품 중에서 쌀값이 제일 적게 들면서도 쌀이 떨어지면 참 슬프다. 나는 즉석 도정미를 조금씩 사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쌀이 똑 떨어져 밥을 못하게 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쌀 정도는 사 먹을 형편이고 밥을 그렇게 많이 해 먹는 것도 아닌데, 쌀이 떨어지면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해진다.
이번 모임에는 친구 한 명이 쌀을 상품으로 가져온다고 했다. 남편이 쌀을 따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려면 최소 3등 안에는 들어야 한다. 나는 골프 치러 가는 남편의 가방을 들어주며 대문 앞까지 따라가서 잘하고 오라고 격려했다.
저녁이 되어 차 소리가 들렸다. 얼른 뛰어나가 남편의 손을 살폈다. 손잡이 달린 봉지가 들려 있다. 최소 3등은 했나 보다. 그런데 봉지가 생각보다 작다. 나는 10킬로그램 정도 기대했는데 4킬로그램인 것 같았다. 밝은 데서 보니 최상품 쌀이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하며 좋아했다.
남편은 골프가 끝나고 집에 오면 하루를 복기한다. 새로 들은 농담, 누군가에게 일어난 신상 변화, 자식들 이야기, 라운딩 중 특이 사항, 캐디 칭찬 또는 흉까지 다양하다. 재미있으려고 가는 것이니 대부분 재미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다. 새로 들은 우스갯소리를 이야기하다 중간에 까먹어서 친구에게 물어보는 전화를 할 때도 있다. 오늘은 누군가 홀인원을 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홀인원을 하고서는 첫마디가 "좆됐다"였다고 했다.
골프를 치면서 누구나 경험하고 싶어 하는 것이 홀인원인데, 어쩌다 생긴 규칙인지 모르겠지만 홀인원을 하면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생긴다. 예전에는 홀 인원 당사자가 골프장에 나무를 심어주고, 캐디에게 많은 팁을 주고, 동반자들에게 다음 라운딩을 대접하고 옷을 한 벌씩 사줘야 했다. 동반자들은 홀인원을 한 사람에게 명패나 트로피를 만들어주고 금 한 냥을 주기도 했다. 팀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해도 일단 돈이 많이 들었다. 이런 일 때문에 홀인원 보험이라는 것도 생겼다. 홀인원을 했던 순간 친구의 머릿속에서 이런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을 것이다. 라운딩 끝나고 저녁을 먹으며 홀인원 한 친구 왈 '마누라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고 했단다. 웃기면서 슬펐다.
다시 쌀 이야기. 남편은 3등을 한 게 맞는데, 협찬자가 참가자 수대로 가져와서 전원이 쌀을 하나씩 가져갔다고 했다. 그래서 집에 가서는 모두 우승했다고 말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럼 3등을 하긴 한 걸까?
50만 원짜리 운동에서 가져온 것은 4킬로그램짜리 쌀이었지만 그 안에는 친구들과의 정, 웃음, 그리고 작은 배려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골프장에서 벌어진 홀인원의 기쁨과 부담, 협찬자의 세심한 준비, 그리고 "모두 우승했다"는 음험한 합의까지.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쌀로 지은 밥은 유난히 고슬고슬하고 구수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