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의 《흰》을 읽고
2018년 2판에는 2016년 초판에 없던 작가의 말이 실려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흰》의 1, 2부를 2014년 방문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썼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창작 배경이 아니라, 작품의 본질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소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히틀러의 폭격으로 도시 건물의 95퍼센트가 파괴된 바르샤바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드레스덴이 떠올랐다. 독일의 드레스덴은 옛 동독 지역에 있던 도시다. 이곳 역시 1945년 영국의 폭격으로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다. 파괴의 터에서 살려낸 벽돌에 새것을 더하여 복원한 건축물들이 매우 인상적이던 도시였다. 과거와 현재가 손잡고 있는 느낌이랄까.
작가가 선택한 '흰'은 뜻이 매우 깊다. '하얀'이 색깔이라면, '흰'은 빛깔의 느낌이다. 이 미묘한 차이 속에 작가의 섬세한 언어 의식이 담겨 있다. '흰'에는 삶과 죽음이 으스스하고 쓸쓸하게 배어 있다. ‘흰’은 순수함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부재의 색이기도 하다.
《흰》은 기존의 문학 장르를 넘나드는 독특한 작품이다. 시인 듯 소설인 듯 그림인 듯, 여백이 많은 글이다. 서사가 뚜렷하지 않기에 독자는 조금씩 아껴 읽게 된다. 마치 시를 읽듯이, 그림을 감상하듯이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글이다. 이 작품은 읽고 나서 독자가 서사를 만들게 한다. 작가가 제시한 파편적인 이미지들과 감각들을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감정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소설 읽기와는 다른 경험이다.
《흰》이 보여주는 것은 애도와 재생의 미학이다. 바르샤바의 폐허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파괴된 것들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대신 그 파괴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찾아내려 한다. 한강의 글쓰기는 기억의 파편들에 현재의 감각을 더해 새로운 존재 방식을 창조해 낸다. 칠삭둥이 언니에 대한 기억은 개인적 상실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본적 취약성에 대한 성찰로 확장된다.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이한 생명, 그 짧디 짧은 존재는 역설적으로 가장 강렬한 현존감을 남긴다. 한강은 이 역설을 '흰'이라는 빛깔로 형상화했다.
《흰》은 서사의 선형성을 포기하고 감각과 이미지의 조각들로 의미를 구성하는 방식, 독자와 함께 완성되는 열린 텍스트 구조, 그리고 무엇보다 애도를 통한 치유의 글쓰기라는 특징을 지녔다. 역사의 상흔을 간직한 도시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이 작품은 결국 모든 상실과 파괴를 겪은 인간이 어떻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흰' 빛깔 속에 스며든 삶과 죽음의 쓸쓸함은,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정화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마치 죽은 자의 영혼을 정화하고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해 행하는 씻김굿 같다.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열네 살 무렵 시작된 편두통은 예고 없이 위경련과 함께 찾아와 일상을 정지시킨다. 해오던 일을 모두 멈추고 통증을 견디는 동안,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다. 손끝이 스치면 피가 흐를 것 같다. 숨을 들이쉬며 한순간씩 더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일상으로 돌아온 뒤까지도 그 감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숨죽여 서서 나를 기다린다.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 들어간다. 11쪽
《흰》한강 글, 문학동네 펴냄,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