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게 '양자 역학'이란?
양자 역학이라는 말을 들어본 뒤로 농담에 가끔 써먹는다. 맞는 말인지 틀린 말인지 확신하진 못하지만 두 가지 다른 것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는 곳이면 마구 갖다 붙인다. 듣는 이도 별 문제 제기 없이 같이 웃는다. 이해했을 수도 아닐 수도, 이 역시 양자 역학의 세계일 수 있다.
처음에 '전자의 이중 슬릿' 실험을 통해 '양자 역학'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을 때는 '양자'가 '둘 다'를 뜻하는 줄 알았다. 전자가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양자(量子)는 특정한 원소나 아주 작은 알갱이의 명칭이 아니라 일정한 양을 가졌다는 표현이다. '양자(quantum)'라는 단어는 '얼마나 많이(how much)'라는 뜻의 라틴어 '퀀터스(quantus)'에서 유래했다. 양자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기본 단위와 비슷한 것이다. 이렇게 수학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물리량이 바로 양자(광자)이다.
양자 역학에 대해 더듬더듬 지식을 쌓으면서 양자 역학이 철학과 제조업의 결합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자 역학은 한편으로는 존재와 관찰, 실재와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는 철학적 사유의 영역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반도체, 레이저, MRI, 컴퓨터 등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기술들을 만들어내는 실용적인 제조업의 기반이 되고 있다.
기존 과학이 가설과 증명의 확실성을 추구했다면, 양자 역학은 불확실성을 가능성으로 본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본질적으로 확률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관측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전자 자체가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불확실성이 결함이나 한계가 아니라 자연의 본질적 특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 불확실성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양자 역학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은 답보다 질문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자는 파동인가 입자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었다. 전자는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파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입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관측자와 관측 대상이 분리되어 있다는 고전적 가정도 양자 역학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묻는 질문, 우리가 하는 측정이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과학뿐만 아니라 삶 전반에 적용되는 통찰이다.
양자 역학의 세계에서 카오스는 없다. 모든 것이 확률적이지만, 그 확률은 정확한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양자 상태의 진화를 완벽하게 예측한다. 개별 입자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지만, 많은 입자들의 집단적 행동은 통계적으로 정확히 예측 가능하다. 이는 우연과 필연, 무질서와 질서가 공존하는 세계관을 제시한다. 미시적으로는 불확실하지만 거시적으로는 질서가 있고, 개별적으로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법칙을 따른다.
나는 양자 역학을 물리학 이론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중첩과 얽힘, 불확정성과 상보성 같은 양자 역학의 개념들을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농담에서 양자 역학을 갖다 붙이는 것이 조금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 물론 여전히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적어도 양자 역학이 추구하는 유연한 사고, 가능성에 대한 열린 마음, 질문의 중요성을 담고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듣는 사람들이 웃는 이유도 이제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양자 역학적 농담을 이해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중첩 상태인 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