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잘 가라

- 나의 오래된 차 이야기

by philosophers needlework

내가 타던 차에 큰 문제가 생길 예정이어서 바꾸기로 결정했다. 거의 20년쯤 탔다. 사람으로 치면 심장은 튼튼한데 관절이 안 좋다. 엔진음은 육중하게 땅을 울리지만 요철 구간을 지날 때면 차축에서 삐거덕 소리가 났다. 신기하게도 추운 겨울날이나 비가 오려고 흐리면 소리가 더 심해졌다. 내 귀에는 '아고고~' 소리로 들렸다. 연식에 비해 주행거리는 짧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그렇게 된 것 아닌가 한다.

새 차를 구입하면서 내가 타던 차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고민이 생겼다. 크게 중고차로 팔 것인가, 폐차할 것인가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남편이 중고차 거래 사이트에서 대강의 가격을 알아보고자 검색해 보았다. 연식을 선택하게 되어 있는데 내 차 연식을 선택할 수 없다고 했다. 오래되었으나 보기보다 속은 튼튼하고 멀쩡하여 조금만 손 보고 살살 다루어 타면 얼마든지 더 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오로지 나의 생각뿐이었음을 알고 충격받았다. 소위 현타가 왔다. 나도 그렇겠구나.

다른 한편으로 폐차 경매 사이트에 올렸더니 경쟁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고 했다. 입찰가가 만 원씩 오른다며 남편이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따라 웃으며 민망하고 허무한 마음을 나누었다. 폐차하면 부품이 재활용되는데 인기가 많은 것을 보면 부품의 가치는 있는가 보다 하고 짐작했다.

차를 정리하는 일을 한 번 미루기로 했다. 나는 아직 작별할 준비가 안 되었다. 차에 얽힌 이야기들이 새삼스럽게 생생하다. 처음에 이 차를 사고서는 죽을 때까지 타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너무 오래 사는 바람에 새 차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동안 큰 사고 없이 잘 타서 많이 아쉽다. 차체 디자인이 눈에 잘 띄지 않고 잔 고장이 거의 없었으며 소모품도 많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연비마저 좋았다. 참 순한 차였다. 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탔고 실제로 그렇게 말해 주는 지인도 있었다.

차량 처분 문제를 고민하다 보니 환자의 생명 연장을 위한 치료를 할 것인가, 존엄한 죽음과 장기 기증을 하도록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그런 느낌이 든다. 최소의 비용으로 고쳐서 더 탈 것인가 아니면 해체하여 다른 차에게 필요한 부품을 내어 줄 것인가. 만약 폐차를 결정한다면 한 사람의 삶이 끝나더라도 그의 건강한 장기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사하는 것처럼 내 차도 마지막 순간에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엔진은 아직 튼튼하니 힘을 잃어가는 다른 차에게 심장을 내어준다. 여전히 맑고 깨끗한 헤드라이트는 밤길을 밝히는 눈이 되어 누군가의 안전한 행로를 돕는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온 묵직한 문짝들은 새로운 차체에서 또 다른 가족을 보호하는 방패가 된다. 심지어 작은 너트, 볼트 하나까지도 어디선가 꼭 필요한 곳에 쓰이며 제2의 생명을 얻게 된다. 이도저도 쓰임을 찾지 못한 부분은 고철이 되어 귀중한 자원이 된다. 이렇게 누군가의 삶에 스며들어 갈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나는 새 차를 세워 두고 이별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나의 올드카를 몰았다. 추억을 되새기며 나의 지나간 시간들과 헤어질 준비를 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잘 가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농담도 잘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