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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 푸드

- 김치 국밥 이야기

by philosophers needlework

편안함과 위안을 주는 음식을 “소울 푸드”라고 한다. 여기서 ‘소울(soul)’은 단순히 영혼이라는 뜻을 넘어서, 정체성과 위로, 공동체의 힘을 담은 말이다. 힘들고 가난했던 시대에도 음식을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문화를 지켜낸 흔적이라서 그렇게 불린다. 어떤 이에게는 김치찌개가 또 다른 이에게는 따뜻한 미역국이나 엄마가 해주는 계란말이가 소울 푸드일 수 있다.

남편의 소울 푸드는 김치 국밥이다. 지쳤을 때나 술 마신 다음 날 숙취 해소용으로 자주 찾는 음식이다. 나는 김치 국밥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끓여야 하는지 몰랐다. 남편은 먹어만 봤으니 설명은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치 국밥 노래를 불러서 만들 궁리를 하게 되었고 이제는 제법 잘 만든다.

김치 국밥은 김칫국에 밥을 말아 끓인 것이다. 김치 국밥을 끓이려면 주재료로 김치·밥·육수, 부재료로 대파, 간을 맞추기 위한 간장이나 액젓이 필요하다. 이렇게 설명하면 간단하다. 하지만 김치를 준비하는 것부터 생각하면 차원이 달라진다. 잘 익어 곱게 삭은 김치가 최고이기는 하다. 이런 김치가 늘 준비되어 있을 수는 없으니 보통의 김치로 국밥을 끓이려면 양념으로 요령을 좀 부려야 한다. 그렇더라도 생김치는 곤란하다.

육수는 멸치로 우린 것이 좋다. 나는 멸치 대가리부터 뼈와 똥까지 통으로 쓰는 것을 선호한다. 육수용 멸치는 크기 때문에 똥도 굵다. 이 똥에서 우러난 씁쓸함이 국물 맛에 킥이 된다. 국물 깊은 곳에서 ‘나 멸치요~’하는 듯하다. 전날 밤 찬물에 멸치를 미리 담가 놓았다가 다음 날 아침 끓이면 시간이 절약된다. 거품도 걷어내야 하고 잡내가 날아가도록 해야 하므로 냄비 뚜껑을 열어둔 채로 끓이는 것이 좋다. 자칫 국물이 넘쳐 화구 주변이 더러워지면 뒷감당이 어려워진다. 펄펄 끓는 물에 멸치가 헤엄치듯 분주히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새로 살아나 바다로 돌아갈 것 같다. 이때 불을 끄고 다시마를 넣고 뚜껑을 덮어 감칠맛이 잘 우러나도록 한다. 여기까지 하면 육수가 다 된다.

육수가 뜸이 들 동안 감치를 준비한다. 김치는 묵은 상태에 따라 손질 방법이 다르다. 아주 심하게 묵은 김치는 속을 털어 내고 살짝 씻어 꼭 짠다. 속이 많이 들어간 김치는 속을 털고 짠다. 나는 김칫국물이 많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김칫국물이 많이 들어가면 찌개에 가까워진다. 짜낸 김치는 취향대로 썬다. 나는 이파리가 너줄너줄 거추장스러운 것을 싫어해 넓은 잎사귀 부분에 세로로 칼집을 넣어 간격을 좁혀 썬다.

한 시간 정도 뜸 들인 육수의 건더기는 건져 버리고 김치를 넣어 끓인다. 제대로 맛을 내려면 김치를 넣어 끓으면 불을 꺼 식혔다가 다시 끓이는 과정을 반복한다. 여러 번 끓이면 더 깊은 맛이 난다. 두 번째 끓일 때 대파를 한 줌 넣고 국간장이나 액젓으로 모자란 간을 맞춘다. 여기까지 하면 김칫국이 마무리된다.

김칫국 절반 정도에만 밥을 말아 푸르르 끓으면 국밥이 완성된다. 남겨두었던 김칫국은 국밥을 추가로 먹을 때 보충해 준다. 국밥이 뜨거워 조금씩 덜어 먹는 사이 냄비에 담긴 김칫국의 밥알이 국물을 빨아들여 죽이 된다. 국물과 밥의 비율을 맞추는 것이 참 어려워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름 터득한 요령이다. 가끔은 삶은 소면을 넣어 끓이기도 한다.

완성된 김치 국밥은 참 볼품이 없다. 그런데도 주방은 난리가 난다. 육수를 끓인 냄비, 건더기를 건져낸 거름망, 김칫국을 끓인 냄비, 여분의 김칫국을 담아 둔 냄비. 김칫국물이 묻은 도마와 칼, 김칫국물이 튄 조리대와 싱크대, 행주까지 정말 번거롭기 그지없다. 내 손에도 김칫국물이 냄새와 함께 배어 있다.

김치로 만든 음식은 계란 반찬과 잘 어울린다.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고 계란의 노란색이 김치의 붉은 빛깔과 조화로워 식욕을 돋운다. 들어가는 재료(계란, 소금, 식용유)는 같은데 계란 프라이와 계란말이는 맛이 다르다. 남편은 계란말이를 더 좋아한다. 나는 당연하게도 그릇을 하나 또 더럽히며 계란을 풀어 팬에 두르고 익혀 말아 계란말이를 만들고 도마에 기름을 묻히며 썰어낸다.

드디어 김칫국에 밥을 말아 끓인 것과 계란말이를 곁들인 김치 국밥이 세트가 되었다. 남편은 '으허 으허' 소리를 내며 거의 울먹일 듯 감탄하며 먹는다. 영혼의 위로를 받는 듯 리액션이 다양하고 풍성하다. 안 만들어 줄 수가 없다.

김치 국밥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들이 번거롭고 힘들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남편이 맛있어하는 모습을 보면 또 만들고 싶어진다. 먹는 사람만의 위로가 아니라 만들어주는 사람에게도 위로가 되는 음식, 아마도 이게 소울 푸드의 진짜 의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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