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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osophers needlework Jun 08. 2023

이모에게 물어보자

- 그림에 대한 열정 되찾기 프로젝트

 

 우리 언니는 그림을 그린다. 아마추어 화가이다. 본인이 이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혹시 언니가 부끄러워할까 봐 아마추어를 붙이기는 했지만 나는 화가라는 전문인의 이름은 꼭 넣어 부르고 싶다. 이 고집에는 언니의 재주와 열정을 사랑하여서 그 길을 계속 갔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 들어 있다.   

   

 언니는 머리가 좋고 재주가 많았다. 어려서부터 뜨개질 목조각 매듭공예와 같은 여러 가지를 아주 잘했다. 가장으로 바쁜 엄마를 대신해 빨래, 청소, 식사 준비 등 집안 살림을 도맡았고 어린 막내를 씻기고 입히고 학교생활을 관리해 주었다. 체력을 기르겠다고 태권도를 배워 검은 띠까지 땄다. 늘 장학금을 탔고 혼자서 시험 준비를 하더니 공무원이 되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퇴근 후 짬짬이 붓글씨를 쓰고 그림도 그렸다. 침대와 장롱 사이 좁은 바닥에 엎드려 붓을 놀리던 모습이 기억난다. 직장에 다니고 사내애 둘 육아에 가사 노동까지 견디며 어디서 그런 열정이 났는지 이해가 잘 안되었다. 나도 결혼하고 살아보니 언니가 왜 그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림 그리고 글씨 쓰고 하는 행위가 일상의 퍽퍽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하는 해방구였던 것 같다.      


 그림이 주는 위안이 어떤 것인지 잘 알기에 언니가 그림을 그만 그리겠다고 했을 때 많이 안타까웠다. 퇴직도 했고 자식들은 다 커서 시간도 많은데 왜 이제 와 그만두는 것일까. 어떤 일을 할 때 정체기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창작 과정에서 스스로 한계에 부딪혔을 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언니는 그림 장르를 바꿔보고 잠시 휴식기도 가지며 그림에 대한 열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잘 안되었던가 보다. 어느 날 ‘이제 안 그려!’하면서 그림들을 포개 상자에 넣고 치워버렸다.     


 그림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려면 우리 가족의 응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지지와 인정이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딸이 그림을 팔아보자는 의견을 냈다. 언니에게 물었더니 한 점이라도 팔린다면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렇게 언니의 그림에 대한 열정 되찾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딸이 다니는 회사에서는 매년 10월을 자선의 달로 정해두고 다양한 기부 행사를 벌인다. 어느 곳에 어떤 식으로 기부할지 개인이 정할 수 있다. 직접 기부할 때는 자신이 기부한 만큼 회사에서 돈을 보탠다. 노동으로 기부할 수도 있다. 지역사회에 손이 필요한 곳에서 일하면 회사에서는 시간당 임금을 계산하여 기부한다. 체육 행사를 하여 모금하고 물건을 기부받아 경매도 한다. 딸은 이번 경매에 그림 석 점을 냈다.      


 판매를 위해 그림의 크기, 재료, 제목 같은 격식이 필요했다. 나와 남편과 딸은 자유롭게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하였다.     


 엄마 : 운하 같다.

 아빠 : 에이, 이건 도로지. 나는 ‘어느 비 오는 봄 아니면 가을의 거리’라고 제목을 붙였으면 좋겠어.

 딸 : 나는 홍수가 난 거리에 하얀 차가 서 있는 것처럼 보여. 그래서 ‘장마’라고 제목을 지었으면 해.

 엄마 : 아, 나는 하얀 보트가 떠 있는 운하라고 생각했는데.

 딸 : 뭐가 맞는지 이모한테 물어보자.

 아빠 : 이걸로 제목을 하면?     


 그렇게 그림은 ‘이모에게 물어보자’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다. 경매 사이트에 그림 관련 정보를 제공할 때 제목을 짓게 된 배경을 짧은 이야기로 함께 소개했다. 그리고 소개 끝부분에 ‘당신은 어떤 제목을 짓고 싶은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이 그림은 16번의 입찰 경쟁 끝에 회사 법무팀에 근무하는 변호사가 낙찰받았다. 


Oil on canvas 53.0 x 40.9 cm   2015년  



 “경매 사이트에 올라온 그림을 가족들이랑 같이 봤다. 10살 딸이 제목을 짓게 된 이야기를 읽고는 너무 좋다면서 꼭 그림을 가져오라고 했다. 우리 가족끼리도 운하인지 도로인지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답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림을 걸어놓고 계속 대화하고 싶다.” - 그림을 받고 변호사가 한 말   


  

 그림이 팔렸다. 우리는 정말 크게 기뻐했다. 더더욱 그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좋아하고 계속 아껴줄 사람에게 팔렸을 뿐 아니라 판매 대금은 요긴하게 쓰일 수 있게 되었다. 구매자가 가족과 함께 <이모에게 물어보자>를 보며 도란도란 대화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훈훈해졌다. 우리가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렸듯이 그 가족도 그림에서 여러 모멘트를 발견하며 행복과 감사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모에게 물어보자>는 미완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미완성이 모자란다거나 부족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이 품은 이야기를 알아봐 줄 감상자를 기다리고 있는 그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림을 자주 보고 이야기를 찾아내 나누고 하는 과정에서 그림도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물론 다른 두 점의 그림도 팔렸다. 

그 그림들도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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