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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주 May 25. 2018

왜 '다시' 읽기인가?

현대판 문맹(aliteracy)의 위기

최근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여러 매체나 기관 등에서 인문학 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심지어 예능에서도 인문학적 주제를 결합해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을 만큼 인문학이 대중적으로 유행을 타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여기에 근래 겪은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건강한 국가와 시민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고민과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표출되고 있고, 이를 해결하는 방안 중 하나로 ‘인문학 교육’을 다시 강조할 만큼 우리는 인문학이 ‘뜨는’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인문학 교육은 크게 세 가지, ‘주제강의’, ‘토론’, ‘읽기’ 수업으로 이뤄진다. 이 중 가장 많이 소비되는 유형은 ‘주제강의’ 수업으로 대체로 강사가 스크린에 강의 내용이 담긴 PPT를 띄우며 특정 주제를 청중에게 전달한다. 소비하는 입장에서 보면 마치 영화를 관람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수업에 와서 강의를 보고, 듣고, 적고, 감상할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강의 끝 무렵 한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들을 수 있지만, 대체로 ‘시청자’로서 강의를 소비하므로 여러 면에서  참가자의 부담이 매우 적다. 이에 반해 ‘토론’ 수업은 [비록 토론 수업에도 여러 방식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주제강의 수업보다는 더 능동적으로 소비자가 수업에 참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생각을 말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이 중심인 토론은 참가자의 능동적 참여가 없으면 진행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소비자는 주제 강의에서처럼 시청자 모드로 수업을 방관할 수도, 군중 속의 개인으로 숨어버릴 수도 없다. 본인이 참여하지 않으면, 달리 말해 수업에 어떤 식으로든 콘텐츠를 제공하는 ‘생산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를 길러내는 수업이 교육적으로나 인문학적으로 훨씬 더 가치가 있다. 다행히, 교육현장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토론 수업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고, 학생들에게 주제 강의만큼이나 익숙한 수업 방식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 다만, 성인을 대상으로 한 토론 수업은 여전히 부족하다. 토론 능력과 토론 교육을 통해 성장하는 합리적 태도는 비단 학생들에게만 절실한 게 아닐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읽기’ 수업은 어떨까? 다소 충격적이게도 앞선 두 수업 유형과 비교하면 읽기 수업은 인문학 교육 내에서도 현저히 낮은 공급과 수요를 보인다. 내가 ‘충격적’이라고 표현한 건, 읽기 행위가 인류가 인문학적 지식을 다루는 가장 익숙하고 오래된 방식인데도 불구하고, 인문학 수업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 읽는 과정은 철저히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루한 옛날 방식’이라는 혐의와 ‘시간 대비 많은 내용을 전달할 수 없을뿐더러 가시적인 성과도 적다’는 ‘효율성’의 논리로 읽기 교육은 수업 과정 이 아닌, 수업 과정 에서, 그것도 나 홀로 감당해야 할 보충 학습으로 분류된다. 심지어 ‘독서 수업’이라는 간판을 내건 수업에서조차도 읽는 행위는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도서관에서든 수업 전에 나 홀로 끝내야 하는 과제로 요구되고, 정작 수업에서는 관련 영상자료를 틀거나 핵심 내용을 칠판에 빼곡히 요약하거나 기껏해야 참가자들의 감상평을 공유하는 정도로 시간을 보낸다. 한마디로 읽기 수업이지만, 읽지 않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읽으려는 의지가 없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지루한 옛날 방식’이라고 비난하지만, 정작 읽기 수업을 해본 적이 없고, 독서 교육을, 특히 고전 읽기를 강조하지만, 정작 읽는 과정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점은 읽기 교육을 둘러싼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For fourteen years I have faced an intransigent problem in my introductory philosophy classes: students will not read. I now believe that aliteracy is the root of all other problems in education. I also believe that most “solutions” simply pass the problem along to the next teacher. As a result, the vast majority of students never acquire the only skill that will let them assume responsibility for their later intellectual growth. If the refusal to read is the problem, the solution cannot be anything but reading. No amount of videos, dialogues, presentations, lectures, or what have you, can solve the problem of not reading. From non-reading, non-reading comes. Similarly, a grasp of philosophy will not come from non-philosophy. Complex ideas will not come from simplified readings. Analysis will not come from generalities. Depth will not come from shallowness. College-level aliteracy will only go away when college students read. Period. What I am calling “aliteracy” is not so much the inability of students to read, but their refusal to do so. (Skipper, “Aliteracy in the philosophy classroom”, 261.)

스키퍼 교수(Robert Boyd Skipper)는 바로 이 "읽으려는 의지가 없는", "읽기를 거부하는" 현상을 "현대판 문맹(aliteracy)"으로 규정한다.


인문학은 인류가 수천 년이 넘는 역사에 걸쳐 비약적인 기술의 발달을 겪으면서도 단 한 번도 텍스트 읽기를 통한 성장을 멈춘 적이 없다. 작가 또는 사상가 또는 학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텍스트를 통해서 자기 생각과 연구를 세상에 던졌고, 우리는 그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들의 통찰을 이해하고, 음미하고, 반영하면서 인류의 지식과 문명을 발전시켰다. 이들이 텍스트를 선택한 것은 단지 자신의 지식을 후대에 전수하기 위한 기록의 목적 때문만이 아니다. 텍스트 기록은, 달리 말해 문자화 과정은 인간의 흩날리는, 정제(精製) 되지 않은 사유와 통찰을 가장 정교한 형태로 남기는 활동이다. 곧 그렇게 문자로 표현할 수밖에 없고, 오직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의미를 갖는 역동적인 지적 활동인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텍스트를 마치 박물관에 꼼짝없이 전시된 유물처럼 지식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기록의 수단으로써만 바라본다. 심지어 몇몇 활동가들은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책 읽기 수업을 비난하면서 책을 읽은 다음의 어떤 정치적·사회적 활동을 염두에 두고 책 읽기 수업을 기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문‘학(學)’이란 낡은 관습을 버리고 인문 ‘삶’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책을 읽는 행위에 관한 몰이해(沒理解)이자 스스로가 인문학적 읽기를 해본 경험이 없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드러내는 자기 고백일 따름이다. 인문학적 책 읽기는 지식의 내용을 앵무새처럼 읊는 데서 오는 성취도 어떤 특정 사회적·정치적 활동을 위한 수단으로 소용되는 도구적 활동도 아니다. 그것은 앎에 관한 욕구의 추동(推動)이자 실현이고, 그 과정에서 경험되는 모든 것, 이를테면, 앎을 향한 경외(敬畏)와 같은 벅찬 감정에서부터 '나'에 관한 물음과 '타자'를 향한 공감,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또는 감정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 전반을 포괄하는 인간의 총체적 활동인 것이다. 이러한 활동이 당장 눈앞의 어떤 물리적 결과물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특정한 '사람'을 만드는 일을 우리는 결코 무의미하다거나 결과로서의 행동에 비해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책을 제대로 읽는 행위는 독자가 타자의 시선과 삶으로 빨려들어가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든 재정립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철학 공부는 무엇인가? 철학 공부는, 어떻게 보면, 타인의 독재에 대한 저항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나도 생각하려는, 그들이 느끼는 대로 나도 느끼려는, 그들이 욕망하는 대로 나도 욕망하려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나도 말하려는, 그들이 행동하는 대로 나도 행동하려는, 저 평균화의 안심이 부르는 유혹에 대한 저항이다. 먹고사는 문제는 절실하다. 누구도 이를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생계 문제는 절실하지만 타인의 독재 밑에서 삶을 사는 것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나는, 학생들이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절실한 현실 문제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허무한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타인의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젊은이들이 먹고 사는 문제만을 자신의 삶의 모든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아니, 자신의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 나의 소신에 따르면, 철학 고전 독서를 거치지 않는 철학 공부는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매우 취약하다. 2차 혹은 3차 문헌을 가지고서 공부를 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은 주겠지만 철학 공부의 본령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 좋은 철학책은 꼼꼼히 뜯어서(어느 정도까지 문장과 문장 간의, 주어와 술어 간의, 타동사와 목적어 간의 관계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토씨 하나하나까지 조사 하나하나까지) 읽지 않으면 사람의 접근을 처음부터 거부한다. 따라서 뜯어서 읽어야만 한다. 뜯어서 읽고 ‘씹는’ 행위 없이는 철학이라 불리는 지적 사고 혹은 지적 행위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창우, ‘나의 생각과 나의 말을 전유(專有)하기’ 중에서)

이창우 교수에 따르면, 철학 공부는 '타인의 독재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이 저항은 '읽는' 행위를 거치지 않으면 불가능하거나 취약하다.


이것이 왜 우리가 인문학이 ‘뜨는’ 시대에 다시 ‘읽기’에 주목해야 하는지에 관한 한 가지 이유다. 제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이 발달한다 해도 텍스트를 담아내는 매개체가 종이에서 전자기기로 변할 뿐, 인문학 교육의 본질이 ‘읽기’에 있고 ‘읽기’로부터 다시 성장한다는 사실은 인류가 지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는 한 변하지 않는다.



Skipper, Robert Boyd. “Aliteracy in the philosophy classroom.” Teaching philosophy 28.3 (2005): 261-276.

이창우, ‘나의 생각과 나의 말을 전유(專有)하기’, <가르침의 지혜>, 가톨릭대학교 교수학습개발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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