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주 Mar 05. 2021

학문과 대중의 경계

⟨‘관음충’의 발생학⟩ 논문을 둘러싼 논란에 관하여

윤지선 박사의 논문 관련한 논란은 젠더 이슈와 별개로 학술 영역과 대중 영역 사이의 긴장과 간극을 고민하게끔 만든다. 개인적으로 윤지선 박사의 표현과 방법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이러한 일은 학술 영역 내에서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서로에게 그다지 얼굴을 붉힐 만한 일도 아니다. 문제는 학술 영역에서 생산되는 결과물이 대중의 영역에서 소비될 때 두 영역 간의 간극이 얼마만큼의 격차를 보이는가 하는 점이다.


일부 영향력 있는 유튜버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비난은 학술 논문을 향하고 있음에도 엄밀히 말해 학술적 비판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다. 물론 이들에게 학술적 접근을 강요할 수도, 학술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중은 대중의 언어가 있고 고유의 소비 방식과 취향이 존재하며 이는 그 나름대로 존중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 물론 앞서 언급한 집단의 비난 내용이 대중의 일반적 여론을 반영하는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다만, 대중 영역에 내던져진 학술적 결과물을 대중이 얼마만큼 적확하게 이해하며 소비하는지가 학술 연구자와 대중 사이의 거리감을 쟬 수 있는 주요한 척도가 된다는 점에서 작금의 논란은 그 어느 때보다 두 집단 사이의 두꺼운 경계를 드러내는 것만 같아 학문 종사자로서 한편으론 두렵고, 다른 한편으론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분야별로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철학의 학문 영역에서 쓰인 논문이 대중과 직접적인 접촉면을 갖는 일은 많지 않다. 대체로 철학사적 맥락에서 발현된 철학의 문제가 논문의 주제로 다뤄지는 탓에 설령 과격한 주장이 제기되더라도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될 뿐 대중 영역에서, 이를테면 언론과 미디어에 관심을 받으며 화두가 되진 않는다. 그만큼 학문 영역에서의 철학 학술 활동은 좋게 보자면 학문적 토양을 계속 일구어나감으로써 철학의 유산을 다음 학문 세대에 온전히 물려주는 일일 테고, 다소 삐딱한 시선으로 보자면 대중으로부터 먼발치 떨어져 대중과 얽혀 발생할 수 있는 종류의 위험을 감내하지 않으려는 회피적 활동일 수 있다.


윤지선 박사의 학술 논문이 이례적으로 대중의 영역에서 논란이 된 이유는 한 유튜버와 관련한 각주 문제와 별개로 그녀의 논문이 대중의, 그것도 어쩌면 가장 표면적 층위에서 다뤄지는 언어와 현상을 직접 겨냥하면서도 대중을 고려하지 않는 방법과 언어로 쓰였고, 이러한 결과물이, 이를테면 학술과 대중 두 영역 간의 틈을 메워줄 어떠한 보조적 단계도 없이 대중에게 내던져졌기 때문일 것이다. 윤지선 박사가 이를 의도했는지 또는 예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방식의 소비는 학자와 대중 모두에게 큰 상처와 서로 간의 적대감을 남길 수밖에 없다. — 만약 조금만 더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중을 고려했더라면, 또는 반대로 만약 조금만 더 학술적 맥락과 학자의 언어를 대중이 이해했더라면, 적어도 논문의 내용이 왜곡 또는 과장되거나 자극적으로 재생산되는 일이 덜 발생했을지 모른다.


윤지선 박사의 논문은 철학의 회피 본능을 거스르는 대담한 시도였을 수 있다. 철학사적 맥락 내에서 일종의 주석을 다는 학술 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언어로 자기 철학을 구성하는 건 다가오는 학문 세대에 꼭 필요한 작업 중 하나이다. 그러나 학문적 대담함과 달리, 논문은 '한남유충', '한남충', '관음충'이란 용어를 가지고 어쩌면 다소 무모한 모델링을 시도하고 있다. 그녀의 논문에서 아마도 가장 논란이 되고, 경우에 따라 거북함마저 유발하는 부분은 해당 용어들을 통해 남성에 의해 자행되는 디지털 성범죄 현상을 "곤충 군집체의 형태발생학적 착상"(261쪽)에 기반하여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행위 주체, 곧 남성은 곤충으로 비유되고, 미성년 남아에서 성인 남성으로의 성장 과정은 일종의 곤충학적 관점에서의 변태 과정으로 이해된다. 비록 "유효한 전략적 분석모델"(261쪽)임을 밝히고 있지만, 문제는 단순한 비유를 넘어 실제로 그렇게 정의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종(種)으로서의 인간을 벌레(蟲)로 규정하고 벌레의 속성을 그대로 인간종에 투사하여 한 인간 또는 집단의 특성과 활동을 규정한다는 건, 종족 선호에 따른 것이든 아니든 간에, 어쨌든 사람들에게 인격(人格)이 훼손된 듯한 충격과 불쾌감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다. 더욱이 분석의 대상이 되는 '-충'의 용어들은 일상에서 실제 생물학적 충(蟲)의 의미 또는 이미지로 사용되기보다는 한 인격을 가장 낮고 철저하게 격하시킬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논문에서 제시된 모델링은 일상언어 사용 맥락을 상당히 벗어나 있다. — 만약 여성 혐오 표현인 '김치녀'를 두고 김치의 맛, 종류, 숙성 과정 등을 통해 해당 언어 및 해당 언어가 지시하는 주체와 현상을 분석하는 모델링을 제시했다면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해당 혐오 표현이 기술될 때 실제 김치 색깔과 맛 등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김치 냄새'와 같은 후각적 자극을 떠올릴 순 있겠지만, 이마저도 상대를 폄하하고 조롱하기 위한 목적이지 실제 식물종 내지는 음식 종류로서의 김치와는 별 관련이 없다. '김치-'는 그런 의미에서 적절한 비유의 조건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그저 하나의 질 나쁜 혐오적 수사(修辭: rhetoric)일 따름이다. 결국 윤지선 박사의 모델링은 대중의 일상언어 분석에 기초하고 있다기보다는 자신이 설정한 프레임 안에서 해당 언어를 차용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런 탓에 저 프레임 밖에 머무르는 이들의 관점에선 그녀의 전략적 모델이 다소 기괴해 보일 수밖에 없다.


대중과 대중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일상언어적 맥락에 강하게 귀속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언어의 사용 빈도에 국한된 것이 아닌, 통용되는 언어에 딸린 대중의 정서와 상식과 통념 모두를 포괄한다. 프레임의 전환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도발이 목적이 아니라면] 이러한 귀속성의 저항을 이해하고 시도되어야 한다.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대중과 척(隻)을 지는 것이 학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표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는 비록 결과적으로 대중의 판결에 의해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그 누구보다 아테네와 아테네 시민들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다가서기 위해,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죽기 직전까지 대화하기를 꺼리지 않았던 학자이다. 오늘날 철학이란 학문이 실천적 영역에서 조금이나마 유의미하게 소용되기를 바란다면, 학자로서의 소신 못지않게, 대중을 향한 거리 두기를 줄일 필요가 있다. 


윤지선. (2019). ‘관음충’의 발생학: 한국남성성의 불완전변태과정(homomorphism)의 추이에 대한 신물질주의적 분석. 철학연구, 127, 259-288.

커버 이미지: Metamorphosis and Other Stories (Penguin Classics, 2019)


매거진의 이전글 싸움의 방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