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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소픽 Dec 14. 2017

괴로운 마음을 나눌 상대가 없을 땐 글이라도 써라.



  정신적인 고뇌는 타인에게 말함으로써 가벼워진다. 왜일까?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의 이해와 애정에서 위로받고 격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뇌를 개념화해 말로 표현하는 것이 고뇌와 자기와의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 아닐까? '남에게 차마 말하지 못할' 고뇌를 말로 표현하려고 할 때 사람은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자신으로부터 고뇌를 끌어내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려 한다. 이때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같이 봐주면 그만큼 고뇌를 객관화할 수 있다. 고통은 그 실체가 확실해질수록 고통에 압도되는 정도가 줄어든다. 그래서 동정의 말보다는 가만히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듣는 역할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혹은 고민을 감추지 않으면 안 될 때 고뇌는 표출할 길이 막혀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고 폭발한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는 말 그대로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위기 상황이다. 어떻게 해서든 정신 내부의 압력을 낮추지 않으면 고뇌는 더욱 안쪽으로 향하게 되어 정신적 파국을 맞게 된다. 자살하거나 미칠 수도 있다. 고뇌를 털어놓을 사람이 도저히 없을 때는 글로 쓰는 것도 안전밸브 역할을 한다. 그런 계기로 탄생한 문학작품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키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레기네 올젠과의 파혼에 따른 고뇌의 산물이고, 뮈세의 수많은 아름다운 시는 조르주 상드와 헤어진 실연의 아픈 경험이 낳은 걸작이다.


  고뇌를 얼버무리거나 고뇌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은 많다. 술, 마약, 도박도 그런 방법 가운데 하나고 일에 몰두하는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고뇌와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고 도망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전의 사는 보람은 무너진 그대로이고 새로운 사는 보람도 찾지 못한다. 새로운 출발점을 찾으려면 고통을 피하지 말고 철저히 괴로워하는 수밖에 없다.


- 삶의 보람에 대하여 / 가미야 미에코 / p.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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