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프레임이냐가 아니라 프레임 구조 자체를 눈치채기
마음과 심리를 다스리는 방법론들 중에 '지금 여기에 머물기'와 '있는 그대로의 나 받아들이기' 등이 있다. 두 가지는 아주 비슷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 아주 효과적이며 강력하기도 하다. 제대로 이해되고, 제대로 체화되어 적용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방법론(과 혹은 그 비슷한)의 경우, 처음 보거나 들을 때는 뭔가 강렬한 느낌도 주고 또 실제 일상에 적용할 부분도 있는 듯하다가 이제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점 그 효과나 영향력이 떨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선 '지금여기'를 보자.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는 이 모토의 의의는, 우리 인간이 '과거-현재-미래'의 설정된 시간 개념과 구조 속에서 살아가면서 정작 실제 존재하고 있는 '지금(현재)'가 아니라 과거나 미래에 더 많은 주의를 빼앗기는 착오에 대한 경고이다.
즉, 이미 지나간 과거에 자꾸만 마음을 빼앗기거나 혹은 과거의 경험, 상처, 기억 등에 사로잡혀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현재를 누리며 살지 못하거나, 혹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기대, 욕망 등으로 현재의 많은 것을 놓치며 사는 그런 세태나 삶의 태도를 바꾸자는 말이다.
지나간 과거이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든 모두 내가 실제 경험하고 있는 '지금여기'에 비하면 마치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 사실은 과거도 그때 당시에는 '지금여기'였고 미래도 그때가 되면 '지금여기'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 항상 '지금여기'에 존재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정작 내가 실제 살고 또 존재하고 있는 지금여기가 아니라 마음속의 환상이나 다름없는 과거와 미래로 끊임없이 마음이 뻗쳐가고 또 거기서 사는 것이다. 실제론 지금여기에 있으면서 마음은 상상의 공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기지 못하고, 지금 함께 있는 사람과 행복하지 못한다. 나아가 정작 그 바라던 미래가 와도, 그때 또 마음은 여전히 또 다른 과거나 미래로 가고, 그 지금여기를 제대로 누리고 살지 못한다. 사실 큰 비극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토의 본래 의의는, 우리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면서 부모와 타인들과 그리고 스스로에게 부여받은 '~한 나'라는 한정되고 제한된 '나'에 대해서 그리고 그 정체성에 대해서 그것이 '본래의 나, 진짜 나'가 아님을 깨쳐 알려주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정체성들은 나름의 의의가 있다. 바로 '활용성과 효용성'이다. 비록 타인과 스스로에 의해 제한되고 한정된 정체성이긴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와 타인, 나와 세상을 구분 짓는 하나의 '경계'로서 그리고 하나의 '도구'로서 기능을 하는 것이다.
핵심은, 그렇게 형성된 혹은 설정된 혹은 부여받은 '나'는 결코 '나의 전부'가 아니고 '절대적인 나'도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필요에 의해, 효용성에 의해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설정되고, 이름 지어지고, 형성되고 구축된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나' 혹은 '나의 전부'라고 여기고, 느끼고, 믿고 살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과 한계 그리고 불필요한 고통 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왜? 본래 아닌 것을 그렇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럼 '본래의 나'나 '진짜 나' 혹은 '절대적인 나'는 무엇인가?
여기서 가장 주의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앞서 말한 '본래의 나', '진짜 나', '절대적인 나' 등도 모두 결국 다른 '설정된, 제한된, 한정된, 임시의 나'와 같은 처지라는 것이다. 그러한 이름을 사용은 하되, 하지만 그 역시 임시적이고 상대적인 설정일 뿐임을 알아채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존의 모든 설정된, 제한된, 한정된 그리고 부여받는 모든 '나'는 단지 그렇게 설정, 제한, 한정, 부여받은 것일 뿐임을 알아 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떠한 이름, 설정, 기억, 체험과도 상관없이 이렇게 여여하게 '실존(실제 존재)'하고 있는 '나'가 있음을 실감하는 것이다(사실 이미, 항상 실감되고 있다). 이것에 대해 '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하나의 임시적인 조처일 뿐임을 눈치채면서 말이다. 이것으로 이미 충분하고 더 이상의 추구나 덧씌움이 필요 없음을 실감하는 것이다.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러함을 눈치 채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제시되는 '있는 그대로의 나'도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되는 것이며, 실제 위와 같이 제대로 받아들이고 적용해 나가면 아주 좋은 방법론이 된다. 그런데 이게 왜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왜냐하면 '지금여기'도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도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주의해야 할 부분에서 주의하지 않으면 말이다. 그럼 무엇을 주의해야 할까?
'지금여기'의 경우, 애초에 '과거-현재-미래'의 인위적 시간 개념에서 없는 과거와 미래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다시 현재로 되돌리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번 잘 보자. 도대체 '지금(여기)'는 무엇인가?(보통은 지금여기는 시간과 공간적 개념이 모두 들어간 것이겠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지금'이라는 현재에 대한 개념으로 간단화시켜서 보자).
우리가 '지금'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그것은 시간상으로 '현재'에 다름 아닌 것이며 이렇게 현재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면 이제 과거와 미래도 자연 전제로 깔리게 된다는 것이 바로 그 함정이다. 즉 현재는 과거와 미래 개념을 전제로 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즉, 과거와 미래에 붙잡히는 마음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 처음에는 현재의 지금(여기)을 사용해서 일단 되돌리기를 했고 그리고 처음엔 이것은 분명 어느 정도 효과가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의식 속에는'과-현-미'의 시간 개념 프레임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우리 마음은 다시 '현재인 여기'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계속 유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고 절대화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제 더 복잡해 지기도 한다. 이전에는 그냥 과거나 미래에 어느 정도씩 마음을 빼앗겼다면 이제는 의식적으로 '지금여기에 머무르자. 지금여기에 머물러야 삶이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되는 거야'등이라고 하면서 마음의 에너지를 막 쓰게 되는데,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게 되는 과거와 미래는 자연히 우리 마음을 이전과 같이 붙들 수밖에 없게 된다. 사실 어떤 역설적 상황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어떤가? 기존의 모든 제한되고 설정된 나에서 자유로워지는 부분에서는 분명 효과가 있고 의미가 있는데, 이제 그렇게 해서 생긴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만 또 다른 설정되고 제한된 나로 만들어 버리는 부분이 바로 함정이다. 그리고 과거의 '나'들과 같이 이제 이 새로운 나를 또 하나의 '절대적인 나' 혹은 '진짜 나', '나의 전부'로 여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풀려 나왔던 감옥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셈이다.
이것은 마치 불교의 '유아론'과 '무아론'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애초에 불교에서 '무아론'이 나온 이유는, 사람들이 기존에 너무 심하게 잡혀 있는 '유아론'을 깨기 위해서였다. 즉 실제 '무아' 즉 '내가 없다'가 아니라, '내가 있다. 주체가 있다'는 이 설정에 사람들이 너무 깊이 빠져 있고, 그리고 그렇게 설정된 '나'를 '절대적인 나' 혹은 '나의 전부'로 여기면서 삶에서 불필요한 고통과 부작용들을 많이 겪으니, 이제 차라리 그 부분에서 반대로 '나라는 것은 없다!'로 해서 아주 강력하게 의식적 충격을 주는 방법론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무아'를 잡는다 해도 이제 문제는 그 '무아'를 또 하나의 새로운 나로 잡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즉 '무아'이지만 사실은 또 하나의 '유아'인 셈이고, 맴돌이이고 도돌이인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유아'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아'도 아닌 것이다. 둘 다 '아(나)'라고 하는 이 어떤 주체 설정의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실제 깨치고 넘어서야 할 것은 바로 이 '주체 설정' 행위이지 그게 있다, 없다는 것은 본질적인 의미가 없는 것이다.
'지금여기에 존재하기'는 충분히 강력하고 훌륭한 방법론이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내가 유일하게 존재하는 지금, 여기. 그래서 과거의 상처나 후회, 기억들이 있다 해도 그것들은 지금여기에서의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그리고 미래의 걱정, 불안들도 만약 필요하면 그것을 미리 예상하고 또 준비하고 해서 실제 다가왔을 때 잘 대처를 하는 용도로는 쓰되, 그게 아니라 지금여기를 누리고 즐기지 못하게 방해하게 두지 않는 것. 그래서 내가 실제 존재하고 있는 지금여기에 나의 온 마음과 의식과 정성을 쏟을 수 있는.
또한 과거나 미래의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내 옆에 나와 함께 존재하고 있는 바로 저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그와 함께 함을 누리고 즐기고 감사하는 것. 이러한 것은 분명 우리의 삶을 더욱더 풍요롭고 실감 있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하고 살아가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부모와 타인 그리고 세상에 의해 나에게 내려진, 혹은 나 스스로 나에게 내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나'는 비록 그것이 존재하고 일상에서 계속 나의 정체성으로 밖으로 비칠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게 '나의 전부', ' 절대적인 나'가 아님을 안다. 오히려 그것은 임시적이고 한정된 나일뿐이며 내가 그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이유는 하나도 없음을 안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구도 심지어 나 자신도 나를 제한하고 설정하고 한정 짓게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미 나에게 존재하는 여러 '나'들, 즉 정체성들을 도구로서 활용하고 사용하며 살아갈 지언정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매몰되거나, 짓눌려 지거나, 위축되거나, 움츠러 들지 않는다.
'나'는, '나의 존재성'은, '나의 정체성'은 항상 활짝 열려 있으며, 기존의 정해진 그런 정체성이 없어도 나는 당당하고 떳떳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 조건 없이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나의 정체성'으로 삼을 만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필요하다면 기존의 정체성들 혹은 새로운 정체성들을 이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다만, 앞서 말한 그 함정과 오류를 조심하면서.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지금여기'를 설정할 때, 그것을 '과거-현재-미래'의 여전한 한정된 시간 개념 속에서의 '현재'로 여기지 않는다. '지금'이라는 말을 쓰긴 쓰지만 그것은 현재로서의 지금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설정과 전혀 상관없는, 그런 개념이나 설정이 없는 '지금'임을 의도적으로 자각한다. 사용하지만 절대시 하지 않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설정하지만, 그것을 또 다른 '나'로 설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사용하는 '나' 역시 위의 '지금'처럼 우리가 언어적 표현을 위해서 임시로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나', 즉 '주체 설정'이 없는 상태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의도적으로 자각한다. 역시, 사용하지만 절대시 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