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지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가정하면서 하라
뒷담화 혹은 뒷따마(?)는 지금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한 모든 이야기이다. 혹 그 사람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만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게 아니다. 어떤 말이든 그 자리에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하면 그게 모두 뒷담화다. 그렇다고 뒷담화가 나쁘다거나 금지해야 할 것이라 말하는 건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우리는 뒷담화를 통해 민족 중훙의 역사적 사명을.. (쿨럭. 죄송하다. 다행히 이 썰렁 개그는 요즘 세대는 모를 것이다.)
여하튼, 우리 인간이 살면서 서로 만나며 뭐든 이야기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대화와 소통 그리고 나눔. 그리고 그 이야기 중엔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것도 정상이다.
(건강한 사회적 비판, 비평은 또 좀 다르다. 그건 사회적 필요에 의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때가 많다. 여기서는 다분히 개인적 상황들을 말한다. 물론 사회적 비판과 비평에서도 조심할 부분들은 분명히 있으므로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부작용이다.
뒷담화가 모두 부작용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시원하고 재미있는 뒷담화를 잘 못할 때 발생하는 부작용을 말한다. 그리고 솔직히 우리가 남에 대해 이야기하면 열에 여덟, 아홉은 반드시(반드시다) 부작용이 생긴다. '어, 나는 남 이야기할 때 항상 조심해서 별 부작용 없던데?' 혹은 '뭐 부작용이 있다 해도 별 거 있겠어? 다들 서로 그렇게 까고 까이며 사는 거지.'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뒷담화의 부작용'은 좀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읽는 분들이 겁을 좀 먹어야 한다. 왜? 그 부작용은 정말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드러나서 보이는 부작용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그런 경우는 보통 내가 한 뒷담화의 내용을 당사자가 어떻게 저떻게 알게 되고, 그리고 그가 나에게 직접 사과를 요청하든지 아니면 자기도 또 다른 뒷담화로 나를 공격하든지 하는 등이다. 즉 드러나거나 숨겨진 서로의 다툼인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나에 대해 말도 안 되는 뒷담화를 하고 다니는 놈(죄송하다)을 내가 직접 찾아가서 대거리를 하든지 혹은 나도 그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들도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내가 남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든, 남이 나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든 그것으로 서로 충돌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쌍방 모두에게 부담이고 고통이 된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심각한 뒷담화의 부작용이 있다. 그게 뭘까?
바로 '인간의 파괴'이다. 세 가지의 파괴가 일어난다. 나의 파괴, 상대방의 파괴 그리고 듣는 사람들의 파괴.
이게 무슨 말인가? 인간의 파괴라니. 사람에 대해 이야기 좀 했다고? 그리고 용어도 좀 이상하다. 인간의 파괴? 뜬금 없거나 혹은 너무 과장한 말이 아닌가? 아니다. 뒷담화 중에서 잘못된 뒷담화, 정도를 벗어난 뒷담화는 실제 말하는 사람, 그 대상이 되는 사람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 모두를 파괴한다. 그리고 그 관계도 파괴한다. 아니 '파괴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말하는 내가 파괴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사실이든, 주관적 판단이든, 내가 누군가에 대해서 부정 하거나 경솔한 혹은 단편적이면서 부정확한 말을 하는 순간 그 말하는 자는 스스로는 무너뜨리게 된다.
우선 듣는 사람의 나에 대한 인간적 신뢰가 무너진다. 오해하지 말 것은 이것이 다분히 무의식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뒷담화를 듣는 그 사람도 스스로의 그런 변화를 모를 수 있다. 해서 겉으로는 같이 맞장구도 치며 혹은 같이 뒷담화를 까며 함께 즐거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의식적으로 잘 못 느껴도 파악할 것은 다 파악한다. 비록 지금은 듣는 사람이 나와 맞장구까지 쳐 가며 같이 즐기는 듯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나에 대한 인간적 판단이 자동으로 내려지고 있다. 이건 그 사람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기제다.
그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내가 자기에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안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 이야기를 이렇게 또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걸 눈치채는 것이다. 사실 우리도 다른 사람이 뒷담화를 할 때 내면에서 이걸 눈치 챈다. 다만 그 상황에서는 그와 이야기를 해 주느라 혹은 대화에 몰입하느라 나 스스로도 미처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느끼든 아니든 이 판단은 저절로 일어나고 그 후에 그 사람을 대할 때 모종의 변화가 일어난다. 왜냐하면 나도 사실은 '아, 이 사람이 지금 내 앞에서 그 사람 이야기를 저렇게 한다면 나중에 다른 사람 앞에서 내 이야기를 저렇게 할 수 있겠구나.'라고 자동 판단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파괴되는 부분은 또 그것만이 아니다. 사실은 나 스스로도 나에 대한 신뢰나 믿음이 무너진다. 이것 역시 다분히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의식적으로도 충분히 느낀다. 왜 타인에 대한 뒷담화를 좀 안 좋게 하고 나면 항상 뭔가 기분이 찝찝하지 않은가? 꼭 그런 건 아니라고? 그래서 '무의식적'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여기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믿지 못하게 되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다. 더구나 무의식적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사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나도 나 자신에게는 하나의 타인이다.'는 부분이다. 물론 좀 특별한 타인이긴 하지만 그래도 타인임은 명확하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객관적 판단을 자동으로 내린다. 물론 주관적 판단도 들어가겠지만 그와 별개로 일어난다.
그래서, 내가 남의 뒷담화를 함부로 하면 우선 내가 먼저 나 스스로에 대한 내적 판단이 일어난다. 그게 위에서 말한 그 '찝찝함'의 정체이다. 이걸 무시하고 계속 계속 더 하게 되면 모종의 내적 분열 혹은 자기 실망 등도 점점 더 커진다. 스스로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파괴되는 마지막 요소는, 그 뒷담화의 대상이었던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 그가 모를 때든 알 때는 이제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왜곡이 일어난다. 그가 모를 때도 그렇지만 그가 알게 되면 이제 완전히 모든 게 틀어진다. 당신이라면 당신에 대해 함부로 말한 적이 있는 사람을 온전히 대할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이 그도 자기에 대해 이상하게 말한 나를 온전히 대할 수 없게 된다. 내가 파괴된 것이다.
뒷담화에 의해 일어나는 두 번째 파괴는 내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의 파괴이다.
그는 이제 나 때문에 그 제3자에 대해서 건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물론 이 부분은 그 듣는 사람이 스스로 내 말을 잘 가려 듣거나 혹은 비평적으로 들어서, 내가 한 말을 모두 고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거의 '듣는 대로 판단하게' 되어 있다.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면 모두 자기가 들은 게 자기 생각이 된다. 사람 무시하지 말라고? 아니다, 사람이란 본래 그런 존재이다.
그러니 내가 한 부정확한 말에 의해, 아무 죄도 없던 청자는 이제 제대로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더구나 부정적으로.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기회를 망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그런데 부정적 뒷담화를 하고 있는 나는 지금 그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제 뒷담화를 듣는 사람은 그 대상만이 아니라 말을 하는 나에 대해서도 부정적 판단을 가지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결국 이중으로 망쳐지는 것이다. 좀 불쌍하다 싶지 않은가?
마지막 파괴의 당사자는 당연히 그 뒷담화의 대상이다.
내가 아무리 정당하고 그럴 듯한 정보, 감정, 명분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는 '파괴'된다. 만약 내 이야기를 듣는 이가 여럿이라면 그리고 퍼져 나간다면 그러며 그 파괴성은 더욱 커진다. 차후에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을 그가 알게 되면 또 더 커진다.
사실은 그 당사자에 대한 파괴성이 가장 크지만 이 부분은 평소 많이 생각할 수 있다 보니 이 글에서는 나와 청자에 대한 부분을 일부러 강조했다. 그러나 뒷담화 대상에 대한 인간적 파괴는 사실 세 가지 부작용 중에 가장 치명적이고 큰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므로 이 글에서의 분량은 적지만 사실 가장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위의 두 가지 파괴는 간접적이라면 당사자에 대한 파괴는 '직접적'이다.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때로는 간접 살인 혹은 정신적 살인에 준할 수도 있다. 왕땅 같은 폭력적 상황에서는 실제 당사자의 죽음과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니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앞서도 말했지만 뒷담화는 다른 말로 하면 그냥 우리 인간의 대화 본능, 이야기 본능의 하나이기도하다.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는 중에 '제3자의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다. 또 종종 시원하고 재밌고 통쾌하기도 하다. 그렇지 않은가? 물론 대부분은 위에서 말한 왕따 상황 같은 정도로 심각하거나 지독하게 하는 것도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3가지 부작용은 모든 뒷담화에서 작용한다. 그 정도가 약하든 강하든, 내 의도가 가벼운 장난이든 심각한 무고이든 모두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를 받는다. 마치 거대한 카르마의 바퀴에 속절없이 깔리는 개미들처럼. 물론 그 카르마는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다.
아무 말도 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잘 못 말하는 것도 안되고. 그럼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여기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물론 이 방법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아, 그럼 앞으로 남 이야기할 때는 이 방법대로 한 번 해 봐야지'라고 굳이 결심할 필요도 없다. 그냥 '아, 이런 방법이 있구나. 그럴 싸한데?'정도로만 느껴져도 된다. 이 방법에 대해 아무 느낌 없을 수도 있고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다 괜찮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나를 좀 더 지키는 것이다. 자신의 삶도. 그리고 내가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들과 또 그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제3자 들도 모두 말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나를 지키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그런 '나의 파괴'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만 잘 하면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파괴는 저절로 방지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래의 방법은 '나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옆에 있다고 가정하고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
혹은 그 사람이 지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가정하면서 하라.
우리가 보통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 혹은 뒷담화를 할 때, 특히 부정적 내용을 말할 때는 사실 '그 사람의 죄'도 크다. 주의할 것은, 실제 그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심판 내린 그 사람의 죄'를 말하는 것이다. 즉 내 관점에서의 주관적 판단이다.
우리가 누구와 관계를 맺으면 여하 간의 것이든 쭉 살아가면서, 부대끼면서 내 속에 그 사람에 대한 어떤 인상, 느낌, 생각 등이 쌓인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어떤 관계든 긍정적, 부정적 요소가 모두 발생하고 쌓인다. 왜 사랑하던 연인들이 결국엔 헤어지곤 할까? 다 그런 부정적 요소들이 쌓이다 임계치에 다다를 때 일어나는 일이다.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서조차 그런 부정적 요소들이 쌓이는데 그냥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래서 그렇게 서로 '쌓이는' 건 사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핵심은, 이제 각자 내부적으로 쌓이는 그것을 스스로 잘 풀거나 혹은 이해와 통찰을 통해, 아니면 직접 이야기를 나누든 해서 해소시키는 것인데 이게 또 용이치 않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냥 그대로 지니고 살아간다. 그러다 또 서로 만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친구든 지인이든 직장 동료이든 그렇게 흘러가는 게 관계이다.
문제는, 그렇게 흘러가는 중에 어느 기회가 생겨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을 때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실제 그 사람'이 아니라 그동안 내 안에 쌓인 모종의 '그 사람에 대한 인상, 느낌, 기분. 나의 주관적 판단, 판정. 그리고 내가 들어서 사실이라고 받아들인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나는 후자가 '실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믿으며 한다. 나의 판단과 정보는 정확하고 사실이라고 여기며 한다. 심지어 나에게 불만이 많을 때는 그를 단죄하거나 심판하는 심정으로 하기도 한다. 마치 당상 위의 판사처럼. 그 결과로 오는 전리품은 '심리적 시원함과 만족감'이다. 사실 살면서는 이런 것도 괜찮다.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
문제는, 그러한 심리적 전리품을 얻기 위해 결국 내가 치르게 되는 희생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앞서 상세히 말했던 '나의 파괴'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청자와 대상도.
그러므로 이것은 비교적 간단한 '선택'의 문제이다. 아무런 실익이 없는 심리적 위안이냐 나의 실제 이익이냐.
만약 '나의 이익'을 목적으로 선택한다면 그러면 이제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사실 '남의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때로는 지인 사이에서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까면서 누리는 삶의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므로 하고 싶을 땐 하자. 뭐 큰 일이 있겠는가. 그렇게 하고 지나 보내면 된다.
문제는 그게 좀 심해질 때이다. 그 '남의 말'이, 그 뒷담화의 내용이 정도를 벗어날 때이다. 그러면 문제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보이는 문제보다 보이지 않는 문제가 훨씬 무서운. 그러므로 그럴 때는 억지로 참지 말고 여기서 말하는 방법을 사용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마치 그 사람이 지금 내 옆에 있는 것처럼, 혹은 그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있는 것처럼 상상하며 말하는 것.
그렇게 하면, 심지어 내가 어떤 정당성이 있고 또 그 사람에 대한 안 좋은 측면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경우에 조차도 내가 먼저 스스로 할 말의 내용을 살피게 된다. 그 사람에게 이 말이 타당한지 보게 된다. 혹시나 조금 지나치게 말하거나 부당한 것이 있는 지 아닌 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같은 뒷담화도 뭔가 다르게 하게 된다.
심리적으로 얼거나 위축되어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하는 말인데 왜 내 마음대로 못하는가. 그냥 다 하면 된다. 다만, 이렇게 스스로 자신을 살피는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비판도 오히려 더 정당하고 당당하게 하게 된다. 그 결과는? 우선은 나를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저절로 다른 이들도 지켜주게 된다. 일거삼득이다.
또 하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렇게 하면, 말을 듣는 사람들도 당신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아주 객관적이고 중립적이고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것도 큰 부수적 이득이다. 사실 필요할 때 이 방법으로 이야기할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당신이 신뢰할 만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심지어 나 자신도 나를 다시 보게 된다. 어쩌면 이게 가장 큰 이득인지도 모른다.
물론 최종적으론, 정말 해야 할 때를 빼곤 관계없는 남 이야기는 되도록 안 하는 게 제일 좋은 것임은 두 말할 것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