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용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이 '정체성' 편은 내용이 비교적 깁니다. 여러 편의 글을 한 편으로 모은 경우라 이해하고 보셔도 됩니다. 차후에 필요하면 각 소제목으로 여러 편의 글로 재편성하여 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길지만 한 편으로 올리는 이유는 그 중요성 때문입니다. '정체성' 부분은 '자기 미움' 매거진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내적으로 쌓인 어떤 기억에도 의지하지 않고,
외적으로 쌓인 어떤 성취와 불성취에도 의지하지 않고
온전한 자기로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해야 할 것을 다 하면 된다.
어릴 적 혹은 좀 더 자란 청소년기에 갖추어야 할 건강한 '자기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정체성의 정의와 관련해서 관련해서 가장 새롭게 강조해야 할 것은 '정체성은 그 사람의 내용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느낌이다!'는 선언이다. 내용이 아니라 느낌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의 '내용'을 본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그가 누구인가, 무슨 직업을 가졌거나 일을 하는가, 어떤 과거를 가졌는가, 무슨 성취가 있었는가, 학생이면 학교는 어디고 공부는 잘하는가 못하는가, 직장인이면 어느 회사를 다니고 연봉은 얼마인가, 창작가이면 어떤 작품을 만들었고 어떤 상을 받았는가, 학자이면 어떤 이론을 만들었고 어떤 연구를 성공했나 등이 되겠다.
하지만 이렇게 내용으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한다!
왜 그런가? 사람의 진짜 정체성은 그런 내용과는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해 왔고 지금 어떤 사람이다라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수 많은 자기 정체성, 자기 효능감, 자신감, 자존감 등에서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내용으로 결정될 수 없는 사람의 정체성을 내용으로 결정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정체성, 그것은 오히려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느낌을 말하는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 저절로 가지고 느끼게 되는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느낌, 당당한 느낌, 떳떳한 느낌'이다. 아무 것 없어도, 아무 것 하지 않아도 지금 있는 이대로 당당하고 떳떳함!
나아가, 심지어 당당하고 떳떳하지 않아도 상관 없는.
물론 정체성의 일부는 그가 가진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거나 표현될 수도 있지만, 본질은 이러한 '느낌, 실감'이다.
유치원, 초등 때 아이들에게 가장 중점적으로 전해줘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비조건적 자존감'이다. 뭘 잘 해야만, 뭘 더 가져야만, 경쟁에서 이겨야만 '나는 괜찮은 존재이다'가 아니라, 애초에 그런 게 있든 없든 그와 상관없이 '나는 괜찮은 존재이다'는 그 너무나 당연한 느낌. 이것은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 '조건적 자존감'과 이것를 학습시키고 주입하고 유발하는 모든 요소야말로 인류 최대의 공동의 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조건과 상관없이 가지는 당당한 자존감이야 말로 누구나 찾아야 할 건강한 '자기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새롭게 만드는 무엇이 아니라 지금도 항상 그러한 본래의 것.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지만 정체성은 '조건적 내용'이 아니라 '비조건적 온전성의 당위에 대한 인지적 자각' 그리고 '그에 기반한 든든하고 당당한 느낌'이어야 한다. 조건과 내용은, 단지 이에 부수적으로 도움을 줄 뿐이다. 있으면 있는대로 효능이 있겠지만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내용을 나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의 조건으로 삼는 것은 착각이다
정체성과 자기 존재의 의미를 내용(혹은 설정)에서 찾으려 할 때는 실패하고 부작용이 올 수밖에 없다. 그 내용 중 대표적인 두 가지는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이다. 나는 '누구'로 결정되거나 '하고 있는 무엇'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들을 사용하고 활용은 할 것이지만 나는 그것들과 관계 없이 온전히 존재할 뿐이다.
자기를 못 났다 여기든 잘 났다 여기든 결과는 동일하다.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인 '비교'도 이 두 가지 때문에 발생한다. 정체성이 만약 삶의 내용으로 결정된다면 그것은 마치 배우가 무대 밖에서의 실제 삶의 존재 의의를 자신이 맡은 무대에서의 배역으로 결정하려는 것과 같다.
그 어떤 것이든, 나에 대한 모든 내용을 활용하되 그 내용과 상관없이, 그 내용이 있든 없든, 심지어 모든 내용을 제쳐버려도 '지금 이미 이렇게 항상 온전하게 존재하는 이 존재감', '있음'의 느낌, 실감. 바로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이자 존재성이다.
나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기꺼이 품어주고 활용하되 그 내용과 상관없이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 단지 이론이나 생각만으로가 아니라 실제 그에 대해 느끼는 생생하며, 묵직하며, 당당한 실감과 존재의 느낌.
이것은 새롭게 만들거나 더 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본래, 항상 그대로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에서 쌓인 내용들을 정체성과 존재 가치의 조건으로 삼는 이상한 패턴에 빠져 착각해 왔던 것이다.
그 착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살아왔고 또 사회와 문화가 그걸 강요하기도 하기에,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그리고 노력해서 다시 마음의 눈을 돌려 내 본래의 정체성을 선명히, 생생하게 느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일단 어느 정도 선명하게 눈치챈다면, 그 다음엔 저절로 누려지는 것이다.
나의 주인인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나를 한정할 수 없다
우리가 존재하는 데엔 이유가 필요 없다. 존재의 이유나 정당성을 삶의 내용에서 찾자면 사실 끝이 없는 게임, 답이 없는 수학 문제와 같게 된다. 이 '내용'은 나와 타인과 세상이 나에게 덧씌우는 설정들이기 때문이다.
'내용에 의한 한정과 제한'을 당당히 거부하고, 내용과 전혀 상관없이 본래 온전한 나의 존재성 그 자체를 느껴주고, 받아주고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 답이다. 동시에 결코 내용을 무시하거나 억압하거나 회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모든 내용을 당당히 이용해 주면서 동시에 그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내용과 상관없이 '항상 이렇게' 당당하고 선명하고 자랑스럽게 있는 이 실존, 그 온전성을 실제로 느끼는 것이다.
평소 당연한 듯이 여기지만 우리가 다시 봐야 할 잘못된 믿음 하나는 '존재에는 이유가 필요하다'는 무의식적 관념이다. 누가 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면 그 이유와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이상한 믿음이다. 우리 대부분이 무조건, 무비판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그런 건 없다.
존재는, 지금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모든 이유와 조건이 충족되었다는 증거이다.
만약 그 조건과 이유가 충분치 않았다면 너든 나든 애초에 이렇게 존재하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내면의 '조건 없는 든든함, 당당함'. 이 느낌을 되찾아야 한다. 애기 때 본래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있지만, 세상과 타인과 그리고 나 자신의 주입한 이상한 조건들과 규칙에 의해 가려진 이 본래 존재감.
(물론 이 말이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존재 자체가 존재의 충족 조건이지만 이제 만약 우리가 능동적으로 취해야 할 여러 대응, 반응, 행동이 있다면 자유롭게 취하면 된다. 여기서는 나의 정체성, 존재감을 중심으로 할 때 강조되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다시 느끼려 해도 처음엔 과거의 부정적 사고 즉 부정적 자아감, 정체감의 패턴이 어느 정도까지는 계속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느낌의 흔적'일 뿐 임을 눈치채며 계속 내용과 상관없는 내 존재의 당당함을 선명히 해 나가면 그런 부정적 자아감, 위축된 자아감도 점점 사라진다.
굳이 더 멋진 나, 완전한 나, 활기찬 나, 성숙한 나 등을 찾아 헤멜 필요 없다. 단지 지금의 '나 아닌 나'들, 내가 태어난 후 지금까지 세상과 타인들과 나 자신에 스스로에게 덧씌워 온 모든 '부정적, 소극적 나'들이 단지 임시의 설정일 뿐이고, 근거 없는 제한일 뿐이고, 어설픈 한정일 뿐임을 또렷하게 눈치채어 점점 지워 나가면 된다. 보내 버리면 된다. 무시해 가면 된다. 그림자는 빛이 있으면 저절로 사라지는 원리이다. 나의 주인인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나를 한정할 수 없다. 이런 마인드를 확고히 가져야 한다. 실제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 아닌 나'들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오롯이 이렇게 항상 있는 나를, 정성스레 느껴주고 안아주고, 받아주고 알아 채 주자. 물론 타인들의 정체성도 그렇게 느껴줄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러하다.
"지금 이대로의 나로 이미 충분하다"
"지금 이대로의 나로 이미 당당하다"
"지금 이대로의 나로 이미 자랑스럽다"
"지금 이대로의 나로 이미 사랑스럽다"
그리고 이것이 타인들에게 향하게 될 수도 있다. 가령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치유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다.
"나는 네가 어떡해도 지금 그대로의 너를 지지하고 사랑한다"
"뭔가 더 성공하고 성취하면 그것으로도 네가 자랑스럽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나는 항상 네가 자랑스러워"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널 지지할게"
왜냐하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알아챔, 눈치챔의 문제이다. 가족이든 학교는 사회든, 그 어떤 공동체이든 아이들에게 이 건강한 자아감과 정체감을 주는 것이 1차 목표가 되어야 한다. '내용'은 하나의 부수적 도구에 불과하다.
가령 개인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건강하게 확립하기 위해 그리고 자존감, 자존심, 자기 만족감, 자신감 등을 고양시키기 위해 그의 개인적 특성, 장점, 측면을 이용하는 것 즉 그의 '내용'을 이용하는 것은 나름 괜찮은 방법이긴 하다. 그래서 초기에 한 개체로서 튼튼하고 건강하게 존재를 세우고 타인과 세상과 관계를 맺어 가는 것이다. 이것으로 충분히 세상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다 죽을 수 있으므로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용으로 구축되는 것은 진정한 정체성이라기 보다는 작은 의미의 '개인성, 개체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개인성, 개체성으로 고유한 정체성을 삼고 자신의 존재 가치로 삼으려는 전략은 근본적으론 한계가 있으며 때로는 크고 작은 부작용도 생길 수 있다. 왜냐하면 휘발성이 크고 임시적이라 할 것에 기반하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단정하고 확장하더라도 내용으로 결정하는 '개인성(개체성)'은 그 자체로 이미 '한정됨, 제한됨'의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는 순수하게 자유로운 '선택의 영역'이지만, 눈치 채지 못하면 절대적인 사실로만 받아들이며 전부로 여기게 되어 다른 여지는 없다고 여기게 된다.
(주: 이것은 개인성이나 개체성을 없애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있다'도 '없다'도 아니다. 개인성, 개체성의 정체 혹은 본질 혹은 본래 구조를 파악한다는 의미이다)
건강한 고유성과 정체성 확립을 위한 좀 더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전략은 개인성과 개체성을 '확실히 품으면서 동시에 그를 넘어선' 수준에서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알아차리고, 느끼고, 강조하고 확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혹은 전략으로 사용되는 것들의 예가 바로 '있는 그대로의 온전함', '존재 자체로의 고유함', '무엇을 잘 하든 못 하든 상관없이 자랑스러움, 사랑스러움' 등이다. 물론 이 전략에서는 이 외에도 여러 관점, 접근이 있고 또 추가로 만들 수 있다. 우선 본인이 먼저 이러한 측면을 명확할 필요가 있고, 그러면서 동시에 자녀나 타인들에게 이를 전해 주는 것이 가장 좋다.
최고의 정체성은 '비한정의 정체성'이다.
: '정체성이 나'가 아니라 내가 정체성의 주인이다.
정체성이란 '개념, 앎, 설정, 분별'과 상관없는, 그런 것 따위는 넘어선 것이다. 그나마 우리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을만한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비한정의 정체성'이다.
지금 이렇게 당당히 그리고 선연히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 어떤 '한정'으로도 감히 제한되지 않는. '비한정'이란 말은 곧 '무한정' 즉 '무한'이란 말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의 무한은 어떤 심리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는 의미에서의 무한이 아니다. 유한, 무한의 개념 프레임 자체와 아무 상관없는, 그것을 넘어선 의미에서의 무한이다. 그래서 아주 가볍게 나폴나폴 거리는 무한이다. '한정되지 않음'의 의미에서의 무한이다.
그러면 자칫 '정체성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당연히 그런 게 아니다. 정체성이란 개념 그 자체를 '개념의 주인'답게 우리가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이 내가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정체성의 주인이다. 나는, 모든 정체성을 품으며 동시에 넘어서 있는 존재이다.
이 선명한 '비한정의 정체성'의 바탕 위에서 혹은 모든 정체성을 넘어서서, 그때그때 필요한 정체성을 자유롭고 여유롭게 가져다 쓰고 또 다 쓴 후에는 보내 주는 것이다.
'조건 없는 존재의 당위성'을 깨치고 그것이 확연한 상태에서 조건을 활용하는 것과, 아직 여전히 '존재에는 당연히 어떠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의존과 전제에 빠져 있으면서 조건을 활용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거의 비슷한 활동을 하고 비슷한 조건을 가진 두 사람이 있다고 할 때, 한 사람은 자신이 행하고 또 가지고 있는 어떤한 조건에도 자신의 존재와 그 당위성을 의지하지 않고, 또 한 사람은 여전히 그 조건들에 의지하고 있다면 그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차이를 눈치채야 한다.
우리의 존재에는 조건이 필요 없다. 조건은, 다만 필요에 따라 잘 이용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