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자'는 자신을 볼 필요가 없다 - 중관(中觀)
"보는 자는 모든 것을 보지만, 보는 자 자신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무척 강력하고 유용한 말이다.
이것을 조금 바꾸어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보는 자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보는 자 자신을 볼 필요가 없다."
왜 그런가.
바로 자신이 보는 자이므로.
두 표현 모두 제대로 자극될 시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을 강력한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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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자' 화두의 핵심은,
자신을 '보는 자'로 보거나, 여기거나, 믿으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보는 자이다'라고 해 봤자, 그건 그냥 또 하나의 아상에 불과할 뿐이다)
'보는 자' 화두의 핵심은,
'나'라는 것이,
내가 스스로 여기는 그 어떤 '나'도
내가 아님을 눈치채라는 것.
'나'라는 나마저도.
그래서 '나'라는 그 설정(분별, 앎, 실체시)의 정체를
눈치채라는 것.
그것이 다만 '허공 중에 만들어진 것'일 뿐임을.
(주의. 만든 '누군가'가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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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설정, 분별, 앎, 실체시'의 짓거리를 눈치채라는 것.
'나'라는 것도 다만 한 쪼가리 분별일 뿐.
'나'라는 앎과 '볼펜, 컵, 책상'이라는 앎이
하나 다른 것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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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을 하기 전에
약견제상'실체상/실재상/사실상'을 하고 있음을
먼저 눈치채라.
'무아(無我)'를 들이민 것은 무아가 진리라서 그런 게 아니라
'유아(有我)'를 하고 있으면서 유아를 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으니
무아를 들이밀어서 자신이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알아채게 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이것이 '중관(中觀)'의 본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