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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Jan 09. 2016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다. 행복이 바로 그 길이다'

행복과 그 방법. 그리고 '품고 넘어서기'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다. 행복하는 것이 바로 그 길이다' - 붓다
("There is no path of happiness; happiness is the path" - Buddha)  


(위 영문의 번역은, 의역하기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순 있습니다. 저는 제 의도를 살려서 번역문을 만들어 본 것입니다)


위 문장이 실제 붓다가 한 말인지 아닌 지는 여기서 상관없습니다. 사실 아래 링크처럼 저 문장이 실제 어느 책에서, 어떤 사람들이 사용해 왔는지를 밝힌 글도 있습니다. Fake Buddha Quotes 사이트


그러므로 이제 그와  상관없이 글을 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령, 사람들은 '행복'과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길(방법)'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행복과 그것을 이루는 방법 등에 관심을 가진다는 건 그것들이 모두 '실재한다'고 믿을 때의 일입니다. 즉,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는 전제가 이미 세워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보통 우리는 이러한 '미리 전제함'에 대해선 눈치채지 못하고, 애초에 그냥 이미 '행복, 길' 등이 '절대 사실'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것들이 인간이 만들어낸 추상적, 임시적, 인위적 개념에 불과한데 이제 그걸 만든 후에 '절대 사실'로 여기고들 있는 것이지요.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다. 행복하는 것이 바로 그 길이다'는 문장은, 사실은 그렇게 추구하고 찾으려는 '행복, 길' 등의 본래 정체와 본래 모습을 보도록 하는 것, 즉 깨우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많은 경우 그렇게 바로 깨치지 못합니다.
 
그 마지막 깨침 보다는 여전히 '행복'과 '길' 등을 전제(사실)로 해서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성취할 수 있는가, 구현할 수 있는 가, 소유할 수 있는 가 등에만 주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관심을 잘 이용해서 대략 두 가지 의도로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다. 행복이 바로 그 길이다'는 문장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첫째 의도는, 그 '상대적인 것(행복, 길 등)'을 여전히 절대 사실 혹은 전부로 이용하면서 좀 더 나은 삶과 존재를 누리기 위한 방편입니다.


이 의도에서는 일부러 '행복'이니 '길'이니 하는 것을 평상시와 똑같이 전제로 합니다. 아닌 걸 알지만 일부러 사용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전과 똑같이 그것을 사용해서는 결국 그 '감옥, 프레임, 맴돌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틀에 갇히는 상황을 깨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개념을 사용하지만 그 개념 속에만 머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그 개념을 구사하는 당사자 본인이 먼저 그러한 개념의 절대시, 전부시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러한 '개념 짓기, 개념 자체의 정체 혹은 본질'을 선연히 눈치채야 합니다. 알아채는 것입니다.  그래야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언어적인 내용(문장)을 떠올리거나 받아들이거나 말한다고 해도 정작 본인은 여전히 그 단어, 문장의 '기존의 뜻'에 갇혀 있거나 혹은 그것들이 '절대적이다. 사실이다. 전부이다'를 고집하고 있다면, 그러면 아무리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다. 행복이 바로 그 길이다'고 생각하거나 말해도 여전히 그 전과 같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공히 말이지요.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아니, 알았는데 왜 바뀌는 게 없지?' 혹은 '야, 그거 말장난이야 말장난!'.(맞습니다. 말장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들고 떠올리고 사용하는 모든 '언어적 개념, 비언어적 개념'은 하나 예외 없이 기본적으론 모두 말장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말장난은 그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사실(의미)'이 있고 또 '장난(무의미)'이 있다는 구분 후에, 후자인 '장난'이라고 여기는 것이겠지요.)
 
여하튼, 이 첫 번째  의도에서는, 이렇게 기존의 행복과 길 등을 그대로 사용하되 이제 기존의 한계, 한정,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문장, 상황을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행복이란 게 분명 있고 그 행복에 이르는 좋고 특별한 방법(길)들이 있다 여깁니다. 그런데 사실 그게 아닌 것입니다. 누구나 웬만큼만 살다 보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 여겼던 돈, 권력, 명예, 사람, 지식, 성취 등등이 실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체험적으로 알게도 됩니다.
 
주의할 것은, 이것이 그런 성취들의 '상대적 편의성과 의미'까지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개인과 집단의 보편적 행복권과 행복 추구권을 방해하는 모든 개인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합리 등을 개선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인이 노력한 만큼 정당하고 당당하게 모든 상대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모두에게 좋습니다. 그러므로 사회를 진보시킬 정당에도 가입하고, 필요하면  협동조합도 만들고, 글도 쓰고, 말도 하고 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과 함께 이 주제를 계속 파고 들어가 봅시다.


만약 우리가 돈, 명예, 권력, 지식, 철학, 신념 등등을 성취한 이들에게 "당신 정말 행복한가?"라고 진지하게 물었을 때, 혹은 그런 당신이 질문을 받았을 때를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질문받은 사람이 외부로는 어떤 표현을 하든 그 속 마음이  어떨지 대략 예상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야 좀 만족스럽겠지만, 어떤 근본적인 '행복'과 연관해서는 거의 아무도 '네'라고 확답을 하지 못합니다. 설사 그렇게 대답을 했다 해도 그게 전부가 아닌 것을 알지요. 여전히  마음속에는 뭔가 '근본적인 미진함'이 남습니다. '이게 아니다'라는 걸 무의식적으로라도 알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란 게 그런 게 아님을.


또한 '행복'을 대상으로 하고 '그 행복에 이르는 길, 방법'을 추구할 때의 가장 큰 모순은, 이것이 항상 '행복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임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항상 저기 멀리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그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도달하고 성취해야 하는 것'이 됩니다. 사실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것을 말이지요.


심지어 자신이 정한 특정한 조건의 행복, 예를 들어 어떤 성적을 얻는 것, 목표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이상형인 이성을 만나는 것,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등을 실제 이루었다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니곤 합니다. 또 다시 '진짜 행복'이라 할 만한 다음 것을 설정하고, 추구하게 되며 그것이 되기 전에는 부족하고 미진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것이지요. 이 마음의 게임은 끝이 없습니다. 이유는, 그 '행복'이란 것이 사실은 어떤 실체도 구체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첫 번째 의도에서 전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어떤 특정 길, 방법, 성취'들로 행복이란 걸 쟁취하려는 헛된 시도를 굳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바로 '행복해라'입니다. 그게 바로 '행복의 길'이란 것입니다. 


물론 아무 것도 안 해야만 된다거나 추구하지 말라, 성취하지 말고서가 아닙니다. 할 건 다 합니다. 필요한 건 다 구축합니다. 다만, 그런 것들과는 상관 없이 행복하라는 것입니다. 본래 목표가 행복이라면, 굳이 없는 이유를 갖다 붙이며 행복을 유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또 여러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행복', '길' 등을 여전히 전제로 하는 한계를 스스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 반론들이 나옵니다. 혹은 시비가 나옵니다.  
 
아니? 이 경쟁과 고통이 처절한 현실에서 그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냥 '행복하라'고? 그게 안 되니까 문제인 거지. 현실도 그렇지 않고. 그래서 노오오오오오오력을 하라구? 아무리 개인이 노력해도 이 금수저, 은수저들의 세상에서 흙수저들이 '그냥' 행복할 수 있어? 그냥 정신 승리만 하라고? 어디서 약을 파고 있어,  미친놈. 꺼져!
 
그런데, 이 반박이 맞습니다! 그래서 위에서도 '정치, 사회적 개혁. 제도 개선' 등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지요.  
 
'행복하는 것이 바로 그 길이다'에 담긴 본래 뜻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행복해라. 어떤 대접을 받아도, 그냥 '헤헤헤'거려라'가 당연히 아닙니다. 그건 바보이죠. 그런 짓을 왜 합니까. 그리고 말 안 해도 개인적, 사회적 개혁과 변화의 실천이 당연히 먼저입니다. 마땅히 해야 하고.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다. 행복하는 것이 바로 그 길이다'는, 할 거 다 하는 와중에 이제 '다르게'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필요해서 할 건 다 하지만, 그러나 꼭 기존의 관점이나 가치관 그리고 타인과 사회의 시각 등에 무조건 매몰되진 말고 뭔가 다르게 접근해 보라는 것이지요. 개인적, 사회적 변화와 개선은 그것대로 꾸준히 이루어 나가되, 그와 별개로 "과연 내가 생각하는 '행복, 행복의 길과 방법'들이 지금 생각하고 믿고 있는 그것  뿐일까? 그것 그대로일까?"라고 말이지요.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자신과 세상을 향해.
 
그래서 혹시 그러한 무비판적 기존 개념, 기존의 추구, 기존의 믿음이 오히려 '진짜 행복'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의심도 해 보고 말이지요. 그리고 뭔가 좀 더 제대로 된, 좀 더 정확한 관점이나 방법이 없을까?라고 찾는 것입니다. 
 
사실 '행복하는 것이 바로 그 길이다'의 뜻을 제대로 눈치챈다면, 정말 '다른 걸' 볼 수 있게도 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기존의 왜곡된 행복관이나 성취 방법이 아니라 뭔가 제대로 된 관점과 방법을 찾는 것이지요. 더 성숙하고, 더 확장되고, 더 지혜로운. 이것은 물론 말과 이론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실제 인식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버트런트 러셀도 그럼 말을 했다 합니다. "행복이란 것에 속지 않으면 우린 행복할 수 있다." 이 말 역시 비슷한 목적을 가진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의 붓다가 했다는 말처럼 말이지요(사실 붓다가 했다고 하지만 위 말은 전형적이 선()의 조사풍의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후자에 혐의를 둡니다. 붓다의 말이라는 건 일종의 속임수인 것이지요. 누구의 말이든 이 경우엔 상관이 없습니다.)


/


두 번째 의도는, '행복'이니 '길'이니 하는 개념들 자체를 넘어서 버리는 것입니다. 없다고 하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 본래 정체를 눈치채는 것입니다. 그 임시성, 인위성, 설정성, 임의성을. 그래서 행복과 행복 추구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이제는 제대로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행복과 상관 없이.


첫 번째 의도와 비슷하게도 들리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첫 번째는 어쩌면 그냥 '좀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행복이니 길이니 하는 개념에 대해서, 기존의 것과는 좀 다르게 말이지요. 그러나 여전히 '어떤 개념'이며, 새로운 것이기는  할지언정 하나의 프레임, 한계, 틀인 것은 같습니다. 위치만 바뀌었을 뿐 감옥 안의 새로운 방이지 감옥 밖이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두 번째 의도에서는, 행복이니 길이니 하는 그런 '개념과 개념 짓기' 자체를 깨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혹은 정체를 파악하고 눈치를 채는 것입니다. 그게 뭔지 알아채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행복, 길이란 두 개념에만 국한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둘을 이용하긴 하지만 결국은 모든 개념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고 떠올리고 만들어내는 '언어적, 비언어적 모든 개념'.  


자,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간종이 언어를 사용하기 전에도 '행복'이라는 게 있었을까요? 그리고 '행복하게 되는 방법'들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뭐 좀 배부르고, 따뜻하고, 편하고, 안정적이고 등의 느낌은 있었겠지요. 그리고 그런 걸 막연하게나마 바라는 심리는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그냥 그런 것이지 그게 지금 우리들이 바라는 것만큼 뭔가 거창하면서도 완전하고, 추상적이면서도 막 기대되는 그런 '행복' 같은 것으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종은 유독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리고 언어에 의한 개념화 재주는 인간에게 많은 잇점을 주었습니다. 특히 '시간'에 대한 개념입니다. 동물들은 거의 시간과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이 없습니다. 침팬지, 고릴라 등의 유인원은 다른 동물들 보다는 좀 길지만 역시 인간에 비하면 아주 약한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즉 과거나 미래를 생각한다고 해도 상당히 제한되어 있는 것이지요. 


어쩌면 행복 혹은 행복추구의 의식적 행위는 시간 관념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내가 충분하지 않고 만족스럽지 않다 여기면서, 이제 그 부족감과 미진함이 채워질 뭔가 '미래'의 어떤 지점, 상태, 조건, 충족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마치 미래를 상상하듯이. 그리고 그러한 것이 '진짜'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사실은 상상인데. '언젠가'라는 가상의 때. 


물론, 그러한 상상의 능력과 추상화의 능력은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아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이 더 크지요. 우리 인간도 그 덕분에 다른 동물 등이 이루지 못한 숱한 문명과 문화를 이루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부작용'이 있는 셈입니다, 우리의 언어 기능에 말이지요. 혹은 같은 도구이지만 잘 쓸 때면 탈이 없는데 그만 잘 못 사용하는 부분에서 탈이 나는 구조. 


그래서 우리는 '행복'이라는 그 만들어진 개념 자체의 정체를 눈치채고, 그것을 넘어서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없다고 여기거나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그런 건 없었지만 어떤 필요에 의해 만들었으며,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용도에 맞게 잘 사용하는 것이라는 것. 그래서 불필요하게 내가 만든 그 행복과 행복하는 방법 등의 설정에 매몰되거나 빠지지 않는 것, 휘둘리지 않는 것, 이용당하지 않는 것. 


여기서 '넘어선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것에서 자유로워 진다는 뜻입니다. 그게 있든 없든 개의치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것을 쓸지언정 그것에 사용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기꺼이 '품으며 그리고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넘어섰지만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개념의 정체를 깨쳐라. 깨뜨려라. 넘어서라'고 하면 사실 굉장히 막연합니다. 해 보려 해도 감도 잘 안 잡히고 엄두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방법적으로 '좀 더 구체적인 대상'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불교 등에서는 보통 그게 '나'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아'니 '유아'니 하는 게 나옵니다. 혹은 '무상, 무주', '공' 등도 나옵니다.
 
주로 '무'의 방법론 즉 부정의 방법론인 '없다, 아니다'가 쓰이는데, 그 이유는 기존에 '나, 모습, 머무름' 등에 대해 그 실체성, 절대 사실성, 전부성 등에 너무 강하게 사로 잡혀 있다 보니 일단 그것을 한번 '흔들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뭔가 움직이거나 혹은 행동을 하려면 일단 기존의 자리나 자세가 흔들려야 하지요? 그래서 자극하고 흔드는 것입니다. 그 멈추었던 상태와 자리를 느낄 수 있도록, 바라볼 수 있도록. 그래서 움직여 벗어날 수 있도록.
 
꼭 '나' 혹은 '무아'나 '무상, 무주', '공' 등이 사용되여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핵심은 '나의 의식이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아무리 누구에게 '무아'니 '무상'이니를 들이대도 그 사람이 그 주제, 개념, 사유에 관심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심드렁할 뿐이고 하품만 납니다.  
 
그래서 뭔가  '관심거리'를 잘 이용해야 합니다. 그 사람 혹은 집단, 사회, 시류가 진짜 관심을 가지는 대상을 잘 포착하고 그걸 이용해서 전체를 넘어서게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론은 인간이 행하는 거의 모슨 종류의 학습, 훈련에 적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행복'과 '행복에 이르는 길'을 사용한 것입니다. 사람이면 웬만하면 모두가 관심을 가진 주제이자 대상이니까 말이지요. 더구나 '행복에 이르는 확실한 방법' 같은 주제는.  
 
두 번째 의도에서의 핵심은, 이제 그 관심을 가지는 대상인 '행복, 길'을 통째로 흔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해당 문장을 보구서 느낌이나 자극이 제대로 온 경우엔 그 사람은 순간 '아~'하면서 잠시 멍해지기도 합니다. 혹은 뭔가 의식에서 '반짝'하기도 합니다. 뭔가 시원한 느낌, 뭔가 깨지는 느낌, 뭔가 훅 벗겨지는 느낌,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 어떤 막이 걷히는 느낌 등등해서 여러 가지로 표현될 어떤 모종의 '느낌'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몸이나 감정적 느낌이 아닌 다분히 '의식적 느낌'이지만 결국 몸과 감정으로도 옵니다.


자, 그래서 무엇을 어쩌자는 말일까요?

그렇게 해서 행복이나 길이니 다 깨졌다.

그래서? 그냥 허무?

무와 공?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 거 하려면 이 모든 행동과 말을 왜 하겠습니까? 그것 역시 바보짓입니다. 두 번째 의도의 목적은, 우리가 행복, 행복에 이르는 길과 방법 등을 추구하면서 혹은 갈망하거나 집착하면서 오히려 그 때문에 괜히 더 힘들어 지거나 고통스러워지는 경우에 대한 솔루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혹은 그렇게까지 갈망하거나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하 간에 우리 인간은 행복과 그와 관련된 바람, 비교, 부족감 등등으로  우울해하곤 하는데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 무엇보다 '행복 같은 것과 상관 없이 행복'  있게 되는 것.


이미 행복을 넘어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진정한 행복을 위해, 효과 없는 방법이 아닌 뭔가 좀 더 제대로 된 길과 방법을 찾고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것. 좀 더 여유롭고 유연하게.


즉, 이런 의문 등을 가지고 그 답을 찾는 것이지요. 만약 그렇게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는 행복과 행복하는 방법 등이 애초에 그런 게 아니라면? 우리가 받아들이고 믿어왔던 그대로가 아니라면?


여기서 이제 여러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결코 기존의 모든 행복, 행복할 방법 등의 개념과 의의를 무시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되도록 더 지혜롭게 더 효율적으로 행복할 방법들을 찾는 게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한정되고 제한된 행복이니, 행복에 이르는 길과 방법이니 하는 것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초에 '행복'이라는 어떤 환상의 정체를 눈치채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행복 같은 건 없다'가 아니라 본래 정체를 눈치채기.


그렇게 자유롭고 나면, 의식적으로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그것들이 다시 더 선명하게 보이면서 뭔가 새로운 관점, 새로운 길, 새로운 방법들이 떠오르거나 보이는.


이것이 하나의 결과적 목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이러한 말이나 의도가 실제 자극이 되지 않거나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가 사실은 더 많습니다. 그러면 그냥  심드렁한 것이지요. 하품 나고. 혹은 문자적, 내용적 반론이나 반박이 있게 됩니다. 자극과 흔들림, 자각이 없다면 그게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러면 또 다른 방법이나 흐름을 만드는 것입니다. 더 관심을 주고, 효과가 있는.(물론 당사자가 최소한의 자발적 관심을 가질 때입니다. 그게 아니면 거의 아무  소용없습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다. 행복이 바로 그 길이다.


어떻습니까?


어떤 자극과 흔들림이 느껴지시나요?




# 참고로, 위 링크된 사이트의 글에 아래 문장이 추가로 있어서 옮겨봅니다. '행복'만이 아니라 '평화'와 '깨달음'을 가지고도 같은 문장을 만든 것입니다.


There is no way to happiness, happiness is the way.

There is no way to peace, peace is the way.

There is no way to enlightenment, enlightenment is the way.







[출간 공지] 책 '자기 미움'의 출간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 가장 가깝기에 가장 버거운, 나를 이해하기 위하여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책 '자기 미움'이 출간되었습니다. 좋은 출판사 '북스톤'에서 종이책과 전자책 모두로 정성 들여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동안 브런치에서 '자기 미움' 심리의 원인과 해결을 주제로 연재해 온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습니다. 책의 부제처럼 이 책이 많은 분들에게 '가장 가깝기에 가장 버거운, 나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책의 내용으로는 '자기 미움 심리, 정체성 문제, 감정 다루기, 상처 넘어서기, 타인과의 관계' 영역에서 실제 도움이 되는 이해와 구체적인 실천법들이 상세히 들어 있습니다.

- 이경희 작가 드림


아래는 책 <자기 미움> 링크입니다.

# <자기 미움> 종이책: 네이버 책 링크 / 교보문고 링크 / 예스 24 링크 / 알라딘 링크 

# <자기 미움> 전자책: 리디북스 e-book 링크 / 교보문고 e-book 링크


축하해 주세요! 책 <자기 미움>이 2016년 문공부 주최 '세종 문고'에 선정되었습니다. '인문/철학/심리' 영역에서 입니다. 선정 후 정부 지원으로 전국 2700여 도서관, 학교, 기관 등에 배포되었으며 전자책 출간 지원도 받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지지와 응원 덕분이라 생각되어 깊이 감사드립니다. 



<관심 작가 브런치>

이시스 작가의 브런치: 흥미로운 신화 이야기(신화 속에 있는 연인과 부부 유형), 힐링 동화, 시, 자기 치유, 따돌림에 대한 좋은 글들이 있는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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