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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Apr 15. 2016

몸은 마음과 영혼보다 신비하다

'나와 타인과 모든 존재'의 몸을 위해. "저기 앞에 바로 그가 있다!"

보통 우리는 마음이나 영혼이 몸보다 좀 더 섬세하거나 신비하다고 여긴다. 마음과 영혼의 양태나 존재 여부를 무엇으로 전제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서양의 한 지혜 전승에서는 오히려 몸이 제일 신비한 것이라 가르친단다.


가볍게 재밌게 생각해 봐도 그렇다.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상상으로 말이다. 즉 몸이 제일 신제품인 것이다. 가장 최신의 기술로 만들어진. 우주의 형성 초기에 아마도 밀도가 낮은 여러 것이 먼저 형성이 되었을 텐데 그게 영혼이 아닐까? 그리고 그 다음이 마음이고 말이다. 그리고 한참을 있다가 밀도가 가장 높은 물질이 형성되면서 우리 몸도 만들어진.


혹은 처음엔 밀도가 낮은 물질들이 점점 밀도가 높은 물질로 되어왔던 것을 몸의 형성 과정이라 해 볼 수도 있다. 여튼 애플의 최신 아이폰처럼, 테슬라의 최신 전기차처럼 그렇게 최신상인 게 우리 몸인 것이다.


사실 위에 영혼이나 마음, 몸의 형성과정은 하나의 메타포(비유)일 수도 있다. 즉 영혼이나 마음, 몸과 같은 이런 구분은 인간의 개념화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들에 불과하다. 실제 물자체들은 이런 구분이나 이름과 상관없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마치 전체 전자기파 영역의 극히 일부인 가시광선만을 보듯이 인간의 감각과 언어 개념만으로 전체 우주 중 일부만 파악할 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사실 우리 우주의 구성은, 96%를 차지하는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이 절대적이고 물질은 고작 4%에 불과하기도 하다)


여하튼, 몸이 마음이나 영혼보다 오히려 더 신비한 대상이라는 말은 무척 매력적이다.




가령 우리는 은연중에 몸보다 더 고귀한 마음 혹은 정신이 있다고 여긴다. 영혼은 더 고귀하고. 그런데 이러한 관점의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발생한다. 즉 몸에 대한 천시가 그것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괜히 몸은 뭔가 불결하거나 모자라거나 부족한 것으로 인식한다. 분별은 항상 비교와 차별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서양의 중세 기독교나 동양의 유교 등에선 이런 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좀 과했던 경우라 할 수도 있다. 인도도 고타마 붓다가 중도의 도를 설하기 전에는 고행 등을 통해 몸에 고통을 가하는 것을 주된 수행으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위와 같은 극단적 경우들은 이제 지나가긴 했다. 지금의 시대에 이전처럼 몸을 노골적으로 천시하거나 억압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겐 무의식적인 몸의 천시 의식이 남아 있다.


반론을 할 수도 있다. "아니, 지금과 같이 몸을 우선시하고 숭배하는 시절이 있었는가? 보라, 몸을 위해 온갖 좋은 것을 먹으려 하고, 편안함을 위하 문명의 이기를 계속 개발하며 사용해 오고 있다. 그리고 이쁘고 멋진 배우나 아이돌과 같은 셀럽들에 대한 환호와 부러움과 숭배는 또 어떤가? 나아가 일부의 경우이지만 몸을 가꾸기 위해 기울이는 저 노력들. 성형, 몸짱, 명품 옷 등등. 가히 몸에 대해 최고의 대접을 해 주고 있는 시대가 지금이 아닌가?"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몸에 대한 진정한 대접은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몸의 편안함을 위해 뭘 해주고, 좋은 걸 먹고, 몸을 고치거나 단련하고, 몸에 무엇을 두르는 것이 몸을 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 몸을 위하는 것은 '몸의 참된 가치'를 알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몸을 위해 주는 것이다. 즉 몸의 고귀함, 소중함을 아는 것이다.


몸의 고귀함과 소중함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은연중에 정신이나 마음, 영혼은 뭔가 고귀하고 소중한 것인데 몸은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실제 몸을 그렇게 대한다. 이것은 고치고 치장하고 하는 것을 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내 몸만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타 존재의 몸에 대해서도 적용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내 몸이 좀 못생기고 맘에 안 든다고, 좀 뚱뚱하다고, 좀 말랐다고 내 몸을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경우들이 있다. 타인의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건 명백히 몸을 제대로 존중해 주지 않는 것이다. 몸의 가치를 아주 낮게 보는 것이다.


몸은 그런 게 아니다. 몸은 그런 몇 가지 조건들 때문에 무시를 받거나 미움, 혐오를 받을 그런 대상이 아니다. 우주에서 혹은 진화의 과정에서 백 수십억 년의 시간 동안의 총제적 결과로써 나온 게 이 몸이다. 그런데 고작 좀 뚱뚱하다고, 말랐다고, 작다고, 크다고 이 몸을 멸시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물론 상대적으로야 좀 차이가 있을 순 있다. 그러나 그 차이란 게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크거나 절대적인 게 아니란 말이다. 몸의 소중함, 몸의 신비, 몸의 고귀함은 그런 것 따위는 저 멀리 날려버릴 정도로 깊고 강력한 것이란 말이다.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사람의 몸을 받아 태어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의 전생을 거쳐야 했다'는 말은 이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일 수도 있다.


몸이 어떻게 저떻게 좀 더 잘나고 못나고 등의 분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다른 조건들은 거의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또한 이런 측면도 있다.


몸은, 그 자체로 가장 신비하고 소중한 대상이자 존재이다. 내 몸만이 아니라 타인, 타존재 공히 그렇다. 자, 그렇기 때문에 나와 좀 다른 몸을 가진 누구라도 다 그렇게 신비하고 소중한 것이다.


나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 나와 다른 성별을 가진 이들 모두. 나아가 나와 다른 성정체성을 가진 이들도 마찬가지다. 장애를 가진 경우도 그렇다. 그런 소소한 차이들은 차이도 아닌 것이다. 아니, 설자 그런 차이를 인정한다 해도 그것과 본래 몸의 신비성, 소중함은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모든 '다른' 몸과 그들의 존재도 내 몸과 내 존재처럼 신비하고 소중하게 되는 것이다.


몸만의 차이가 아니다. 나와 다른 생각, 주장, 신념, 종교, 윤리, 철학을 가진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그렇다. '몸 그 자체'로 너무나 신비하고 소중한 것이다. 다른 모든 요소들이 상쇄되고도 남을 정도로 말이다.


또 추상적인 생각, 정신, 마음 등으로 대상으로 하는 것 보다는 눈 앞에 보이는 생생한 몸을 대상으로 하면 우리의 관심, 사랑, 존중도 더더욱 생생하게 발현될 수 있다. 글자 그대로 '저기 앞에 바로 그가 있다!'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만이 아니다. 인간과 같이 사는 개나 고양이 등의 반려 동물, 그리고 인간과 같이 살진 않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숱한 야생의 동물들과 존재들. 이들 모두도 우리와 같이 '몸'을 가진 존재들이다. 심지어 원세포 생물까지도 말이다. 우리의 몸이 신비하고 소중한만큼 그들의 몸도 당연히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에 의해서 그들을 취하거나 이용하는 부분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느 경우든 '정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 현재 인간은 그 '정도'를 좀 많이 넘어선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제 '다른 몸, 다른 동물, 다른 존재'들을 좀 더 존중해 주고 지켜주자고 말과 행동을 하고 있기도 하며 이것은 타당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변화가 '몸은 마음과 영혼보다 더 신비하다'는 통찰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몸에 대한 집착'은 어떻게 봐야 하고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앞서도 말했지만 몸을 소중히 여기기는 여기지만 뭔가 이상한 부분 말이다. 자기 몸의 편안함, 안전, 이익을 과도하게 추구하고 확보하느라 타인이나 타 존재들을 착취하거나 억압하기. 혹은 몸 자체에 대한 숭배로 인해 주의가 온통 외부적인 몸에만 가 있는 경우 등 말이다. 이런 경우는, 하고 있는 본인들은 잘 모르지만 밖에서 보면 다들 이상하다고 느낀다. 뭔가 비정상이고 뭔가 아닌 듯하게 말이다. 그리고 본인들도 내부적으론 뭔가 허전하고 공허해지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잘 눈치를 채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은 자기 자신들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오해에 기반해서 '몸에 대한 집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치유 혹은 대처는 사실 간단하다. 바로 '몸에 대한 진정한 정의'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사실 '몸'이란 우리의 피지컬 몸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즉 물리적, 생리적 세포로 구성된 육체만을 말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물론 얼핏 보면 가장 선명히 보이는 것은 이 물리적 몸체가 맞다. 그러나 이 물리적 몸체를 구성하기 위해 백 수십억 년의 세월 동안 여러 가지가 쌓이고 준비되었다.


사실 그 준비되고 쌓인 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우리는 모른다. 영혼, 정신, 에너지 등등의 말도 엄연히 말하면 단지 인간이 자신의 의식과 지각 범위 안에서 만들어낸 임시 이름들에 불과하다. 혹은 그런 추상적 개념들이 아니라 현재까지 과학이 발견한 최신의 개념들을 사용해서 설명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 발견과 그 개념들, 이론들도 결국에는 계속 수정되고 발전될 것이며, 그것들로 이 몸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정확히 혹은 모든 것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몸은 명백히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왜 굳이 이 그 모든 총제적 신비의 결정체인 몸을 '고작 물리적 몸' 하나로만 한정 짓느냔 말이다. 그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건 마치 100가지 선물이 든 선물 주머니를 주면서 다 가지라고 했는데 그 안에서 하나만 가지기로 하는 것과 같다.


몸은 우리가 알고 모르는 무수한 것들로 구성된 존재이다. 그런데 왜 그 다른 많은 멋진 것들을 놓아두고 '물리적 몸'의 요소라는 이 하나만으로 그를 환원시키느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바보 같은 짓이다. 물리적 몸이 가장 선명하고 가장 먼저 눈에 띄이고 또 사용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신비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쩌면 몸은 우리가 마음이니 정신이니 영혼이니 라고 이름 지은 그 모든 것을 다 품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실제 그렇다. 그렇다면 더더구나 더 신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말하는 '몸의 신비'는 어떤 유물론이나 물질주의적 관점은 분명히 아님을 밝힌다. 또한 유심론이나 신비주의적 관점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관점들을 모두 기꺼이 품고, 그리고 그 마저도 넘어서는 관점이 되겠다.)   


이러한 통찰로 접근한다면, 몸의 신비와 소중함을 잘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몸만'을 위하게 되는 관점이나 집착, 욕심 등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우리 몸의 신비와 소중성에 주목해야 한다. 우린 아직 제대로 우리의 몸에 대해서 그리고 타인과 타존재의 몸에 대해서 진정으로 진지하게 접근한 적이 없다고 봐야 한다. 어느 경우에는 너무 멸시하거나 무시했고 어느 경우엔 또 너무 집착한다. 또한 무심하고 심드렁한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몸은 마음과 영혼보다 더 신비하다. 더 소중하다. 더 섬세하고 더 놀랍다. 물리적 신체 몸이 주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물리적 몸을 품으면서 그 이상의 신비와 소중성이 있다. 그런데 우선은 물리적 몸, 신체적 몸을 좀 더 중심으로 두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동안 너무 관심을 제대로 주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은근히 모지리로 취급해 왔기 때문이다. 제대로 인식하고 대접해 주면서, 동시에 불필요하게 과도한 집착을 하지 않으면 된다.


몸은, 그 자체로 이미 신비하고 소중하므로 나도 신비하고 소중하다. 내가 어떤 조건, 어떤 상태에 있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타인들도 그렇다. 동물 등 다른 존재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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