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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Mar 31. 2016

어느 날 문득 나를 찾은 소녀 이야기

모든 (부정적) 이름으로부터의 해방

한 소녀가 있었다.

그리고 엄마가 있었다.


불행히도,

마음이 아팠던 엄마는

어릴 때부터 소녀를 이렇게 불렀다.


"못난 년,

게으른 년,

잘난 척하는 년,

이기적인 년,

욕심 많은 년,

무식한 년,

교활한 년"


다른 사람들로부터

제대로 된 모습으로 불린 적이 없던 소녀는

정말 자신이 그런 존재라 믿으며 자랐다.


소녀의 삶은 당연히 힘들었다.

특히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을 때

자신의 스스로 믿는 자기상들은

그녀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일을 할 때도 마찬 가지였다.


하지만 소녀는 그게 당연한 것일 줄 알았다.

여러 가지 고통이 있었고 힘들었지만

본래 그런 것일 줄 알았다.

왜냐하면,

스스로 여기는 자기 모습이 그러니까.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가 나라고 여기고 있는

이 모든 이름들이 정말 나일까?'


어릴 때부터 들었던 엄마의 목소리는

그녀에겐 절대적이었기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대로 모두 자기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점점

엄마의 그 목소리가

전부가 아니고 절대가 아님을 깨쳐가기 시작했고

그 깨침이 내적인 어느 임계점을 넘는 순간

그녀에게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뭔가를 부정하는 '부정의 의문'이 아니라

모든 부정을 깨쳐 넘어 버리는 '대긍정의 의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알아챘다!


'아, 엄마가 붙여줬던

그 모든 이름들이

나의 이름이 아니었어!

그냥 엄마가 붙인 이름이었지

그게 내가 아니었어.

내 모습도 아니었어.

그것들은 나를 제한하고 한정할 수 없는 거야.

나는 그런 이름들로 결정되고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야!'     


그 순간,

그녀는 자유가 되었다.


아니, 사실 자유로울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갇힐 것도 없음을

어디서 탈출하거나 나와야 하는 것도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냥, 단지

그 모든 과거의 이름들이, 자아상들이,

내 모습이라 믿었던 것들이

'다만 마음 아픈 엄마가 자기도 어쩔 수 없는 한계 속에서

나에게 붙였던 하나의 단어일 뿐임'을 알게 되면서는

이제 그냥 그 모든 이름들은 그냥 날아가 버린 것이다.


없어져야 하거나, 지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아무 상관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들의 정체가 뭔지 아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그리고

소녀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았다.


과거의 모든 부정적 이름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소녀가 과거처럼 어떤 새로운 이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녀는 더 이상 자신이

'한 낱 이름'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과거의 그 부정적 이름들만이 아니라

아무리 긍정적, 좋은 이름들이라 해도

무한정으로 자유로이 존재하는 나에게

붙여서 그것에 스스로 갇히는 순간

무한의 나는 그 좁디좁은 이름 속으로

쪼그라들어가는 것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녀는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더 이상 어떤 이름에도 갇히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니 갇힐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나를 이름 짓는' 행위의 정체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빤히 정체를 알고 있으니 갇히는 게 오히려 불가능해졌다.


소녀는 이제

그렇게 아무 이름 붙이지 않아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당하고, 유연하고,

충만하고, 만족스럽고,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게 있는 자기 존재를 그냥 만끽했다.

그냥 향유하고, 누리고, 즐기고, 허용하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모든 이름을 거부하고 아무 이름도 안 쓰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 이름이든 긍정적 이름이든 상관 없이

유용하고 필요한 이름이 있으면 자유롭게 가져다 썼다.


그녀는 때로는 그냥 '나'가 되고,

때로는 엄마가 되고,

때로는 아내가 되어 주었다.

때로는 도와주는 이가 되었고,

때로는 도움을 받은 이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 이름들과 아무 상관없이

항상 본연의 존재로 있었다.


자신이 존재하는데

더 이상 어떤 이름에도,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므로


이미, 본래, 항상, 저절로

자연스럽게, 당당하게,

유연하게, 충만하게,

만족스럽게, 사랑스럽게,

여유롭게.




무아란,

마치 이 소녀와 같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어떤 이름, 자아감, 자아상, 개체감, 존재감이든

필요와 효용에 따라 그것을 이용은 하되

그 모든 '상'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친 것.


본래 무한정의 존재인 우리는

그 어떤 좋은 조건이어도

만약 붙이게 된다면

유한정의 존재가 될 뿐인 이치.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심지어,

'나'라는 이름과 개념과 느낌과 믿음마저도

예외가 아님을, 단지 그 중에 하나임을 눈치챈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덧붙여지지 않고,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아도

오롯이 있는 이 온전한 존재감을 느끼고

그에 머무는 것.'


잘 살펴야 할 것은,

이것이 '마지막 자리'는 아니란 것이다.


이 마지막에 느끼고 있는 여하 간의 어떤 존재감, 자아감, 있음의

느낌도 미세할지언정 결국에는 또 하나의 '이름'이다.

하지만 그냥 이름은 아니고

'마지막 이름, 마지막 자리'이기는 하다.

하지만 결국엔 이것도 이름이다.


일단은,

이렇게 아무것도 덧붙여지지 않은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마지막 자리, 존재의 자리에 있으면

많은 것이 해소되고

많은 부분에서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잘 이용하자.


이 자리를 바탕삼아 그 위에서

모든 이름, 존재성, 정체성을

자유로이 선택하거나 놓아주며 살면 된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마치 위 이야기에서의 소녀와 같다.

(그러므로 생각과 읽기를 여기서 멈추어도 된다. 좋다.)




다음 단계는 이와 같다.


이 자리 너머를 아는 것.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의식 기능과 구조로는 불가능하다.

상식적으로 봐도 그렇다.


여러 현란한 상상을 하고 환상의 이름을 붙일 순 있겠지만

어떤 상상, 이름도 결국 그 마지막 자리에서 오염된 것일 뿐.

그러므로 구태여 그런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뭔가를 하는 순간 다시 그 자리이므로.

맴돌이 이므로.


그렇다면 불가능하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가?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아무것도 덧붙여지지 않고

아무것도 의존하지 않는 이 마지막 자리마저도

결국에는 '이름 붙은 자리'임을 알아채는 것이다.

그 정체와 본질을 눈치채는 것이다.

이것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간과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으로만 눈치챌 땐 아무 일 없지만

정말 제대로 눈치챌 때 무언가 일어난다.


이제 이 부분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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