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가치가 의존 대상에 의해 좌우된다는 착각에서 자유롭기
'자기 미움'의 심리 기제는 다소 복잡하다. 특히 자기도 잘 모르게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부정적 나에 의존하기'이다. 이 말은 조금 의외로 들릴 수 있다. '내가 부정적인 나에게 의존한다고? 말도 안 돼. 오히려 그것 때문에 힘든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의존하고 있다. 이 글과 함께 우리도 모르게 가지는 자기 미움의 또 하나의 숨은 심리를 눈치채고, 그것을 품고 그리고 넘어서자.
작년 하반기, 브런치에 '자기 미움' 매거진을 만들고 관련 글을 써 온지 벌써 6개월 여가 되어 간다. 이제까지 총 50여 편의 글을 썼다. 그중에서 '자기 미움의 숨은 심리'라는 직접적 제목으로 쓴 글이 이 글 까지 해서 4편이다. 앞으로 여러 편이 더 쓰여질 듯하다. 물론 매거진 내의 다른 글들도 모두 자기 미움 기제와 주제에 대한 글이지만 '숨은 심리'라는 제목으로 쓴 글들은 좀 더 직접적으로 우리가 가지는 자기 미움의 심리를 분석하고 파악하는 경우다. 그래서 불필요한 자기 미움의 마음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 목적이다. 혹시 지난 글을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아래에 필자가 자기 미움 주제의 글을 왜 쓰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처음의 글과 그리고 자기 미움의 숨은 심리에 대해 먼저 쓴 3편의 글 링크를 올리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 자기 미움의 숨은 심리(2): 부정적 생각을 자기로 여김
- '내가 하는 생각'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함정
부정적인 나에 의존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긍정적 나에게든 부정적 나에게든 '의존하기'는 같다
이 글에서 함께 보고자 하는 또 하나의 숨은 심리는 '부정적인 나에 의존하기'이다. 우리는 보통 '부정적'인 것은 싫어하고, 멀리하고, 없애려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부분에선 그렇다. 그런데 '부정적인 나' 즉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부정적 자아상, 부정적 자아감, 부정적 존재감, 부정적 자존감 등이 있을 때 실제 일어나는 일은 오히려 반대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
여전히 의아해할 수 있다. '아닌데. 난 정말 이렇게 내가 느끼는 부정적인 내가 싫은데. 없애고 싶고, 고치고 싶고, 멈추고 싶은데. 그런데 왜 내가 이것에 의존한다고 하지?'하고 말이다.
우리가 정말 싫어하는 게 있을 때 우리는 그걸 진짜로 버린다. 그에서 떠나거나 안 봐 버린다. 실제로 그렇게들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부정적인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심지어 옆에서 다른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해도 스스로 끊임없이 다시 부정적 나로 돌아오고, 그에 집중하고, 그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여기, 우리가 정말 눈치채야 할 것이 있다. '긍정적 나'이든 '부정적 나'이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기제에서 정말 핵심은 '의존'이다. 내가 의존하는 대상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본질적으론 상관없는 것이다. 내가 의존하느냐 아니냐가 핵심인 것이다. 이것을 선명히 눈치채야 한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는 자신의 존재성을 스스로 확인하게 위해 여하간의 '대상'에 자신을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소유한 물건이 될 수도 있고, 자기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믿는 종교, 주장하는 가치관이나 신념과 철학, 성취한 일, 외모, 부모, 자녀 모두가 될 수 있다.
그 의존하는 대상의 가치나 의미만큼 자신의 존재성이 확보되고 확인되는 것이다. 당연히 그 대상의 가치나 의미가 크면 클수록 나의 존재성도 커진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는 게 있다. 바로 그 의존의 대상은 꼭 긍정적인 것, 좋은 것만 되는 게 아니란 부분이다. 즉 부정적인 것, 나쁜 것도 얼마든지 내 존재성 확보를 위한 의존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두 말이다. 요는 좋은가, 나쁜가 혹은 긍정적인 것인가, 부정적인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의존할만한가'가 되겠다. 그 강도나 파워, 영향력이 클 수록 의존도도 높아진다.
그래서 가끔 정신적으로 병증이 있는 이들이 남들은 범죄나 이상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 혹은 혐오를 일으키는 일을 의도적으로 하기도 한다. 그를 통해 세상과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거나 두려움이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성이 확인되므로. 인터넷 상의 일부 커뮤니티에서도 그런 일이 종종 있다. 영화 등에서는 그런 인물이 연쇄 살인범 등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자기 미움의 심리에서는 그 의존하는 대상이 바로 '부정적 나'가 되는 것이다. 분명 안 좋은 것이고 부정적인 것이지만 나도 모르게 그것을 나의 존재성의 기초 혹은 정체성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싫어하고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그에 의존한다.
만약 자기가 비교적 자기 부정, 자기 미움의 심리가 강하다면 그것을 멈추거나 없애려 해 보라. 더 이상 스스로 자책이나 자괴감, 죄책감 등을 가지지 않으려 의도적으로 해 보는 것이다. 자기 절망이나 자기 책망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없애려 해도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느끼게 되는 데는 나만의 어떤 정당하고 합당한 이유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좋고 나쁘고와 관계 없이, 나도 나름대로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느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일 뿐이다. 건강한 자기반성이나 자기 판단이라고 여기고 있겠지만 그냥 자신의 존재감,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적 나'라는 대상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경우의 문제는, 존재성 확보는 성공했지만 대신 마음이 무척 괴롭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나 일상에서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그 괴로움 마저도 결국 존재성 의존의 대상이 된다. 아주 묘한 기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측면도 있다. 만약 어떤 이가 부정적 자아상에 스스로 깊이 매몰되어 있다고 하자. 그때 주위의 친구나 지인이 "너는 좋은 사람이야. 너는 할 수 있어. 나는 너의 장점을 볼 수 있어. 네가 고민하는 그 부정적 모습은 너의 본모습이 아니야." 식으로 조언을 주거나 힘을 주려 한다. 이때 그 사람의 외적인 반응은 경우에 따라 그 말들을 거절하거나 받아들이거나 하겠지만, 그 내적인 마음은 열에 아홉은 그 말들을 거절한다. 즉 '나는 그렇지 않아. 나는 여전히 내가 여기는 부정적 사람이야'라고 한다는 것이다. 타인들이 자기를 위해 하는 말을 오히려 자기를 부정하는 것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이 때의 자기는 '부정적 자기'이다. 그렇게 동일시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든 외부인들이 하든 자신의 부정적 자아상을 깨뜨리거나 없애거나 수정하려 할 때 오히려 저항감을 느끼거나 표현하고, 자기에게 해로운 기존의 것을 계속 고수하려 하는 건 왜 그럴까? 이미 그것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더 타당하다고 믿고 있으며, 그게 더 익숙한 것이다. 그게 '자기'인 것이다.
'긍정적 나'를 강조하는 건 답이 아니다
그러면 이 의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경우 그 반대인 '긍정적 나'를 강조하곤 한다. 긍정성을 키우고, 긍정적 자아상을 새롭게 확립하는 등으로 말이다. 물론 상대적인 측면에서는 이렇게 긍정적 나를 의도적으로 키우고 그에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의존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할 수 있다면 최대한 하도록 하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근본적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앞서도 말했지만 어느 대상에든 '의존하기'는 같기 때문이다. 즉 긍정의 나에게든 부정의 나에게든 나의 존재성, 나의 가치와 의의, 나의 정체성을 의존하는 구조는 같은 것이다. 그런데 긍정적 나에 의존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냐고 물을 수 있다. 그건 괜찮지 않냐고 말이다.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지만 문제는 긍정이나 부정이냐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의존성이다. 나의 존재성, 가치, 의의 등을 무언가에 의존한다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의존을 하는 중에도 뭔가 불안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흔들리고 언젠가 그 의존은 부정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왜? 나의 존재성은 그 어떤 내부와 외부의 대상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성은 그 자체로 고유하고 의미 있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잘 하고, 성취하고, 열심히 하고, 자타의 인정을 받는 것 등에 나의 존재성을 의존하게 되면 이제 만약 그것들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면 나의 존재성도 같이 흔들린다. 심지어 내가 계속 잘 하고 있는 경우에도 겉으로는 그것을 즐기고 자타의 인정을 받으며 만족해 하지만 내심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드는 것을 멈추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실 잘 나갈 때에도 미래에 잘못 되거나, 실수나 실패를 하거나, 추락하는 것에 대해 미리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잘 될 때의 그 불안감은 꼭 이 미래의 추락에 대한 불안만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내 존재성을 의존하지 못할 '대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불안이다. 그 대상이 잘 나가는 긍정적 나일지라도 말이다.
존재성 '의존하기'를 넘어서기:
존재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존이 필요 없다.
내 존재성은 내가 의존하는 대상과 상관없이 고유하고 당당하다.
일반적으론, 우리는 자신의 존재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 무엇에든 의존해야 한다. '일반적'이라 일부러 표현한 이유는, 우리는 본래 그런 의존 없이도 잘 살아가고 존재하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지만 그걸 눈치채기 전에는 '의존함으로 존재함, 의존함으로 의미 있음'이 절대적이라 오해하며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생존본능 혹은 자기유지본능, 자기보호본능이라 할 수도 있다.
이 본능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존재하는,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당연히 생존과 유지와 보호를 행해야 한다. 이건 자연적 패턴이다. 그러면 무엇인 문제인가? 잘못된 관점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그것을 하려 할때가 문제이다. 그럼 무엇이 그 '잘못된 관점과 방법'인가?
'의존' 그 자체도 큰 문제는 없다. 우리가 제대로 서려면 유용한 무엇에 기대거나 의지해서 제대로 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대신 의존 기제가 절대적인 무엇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단지 하나의 유용한 도구이자 수단일 뿐이다. 우리의 생존과 유지, 보호를 위한. 그러므로 잘 사용하고 활용해 주면 된다. 문제는 그 의존과 의존의 대상을 절대화하거나 전부로 여길 때 발생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이제 우리는 '의존하는 대상이 없으면 나의 존재성도 무너지거나 없어진다'는 식의 이 어설픈 설정을 깨어 버려야 한다. 혹은 '내가 의존하는 대상의 가치나 의미에 의해 나와 내 존재성의 가치와 의미가 결정된다'도 마찬가지이다. 얼핏 그럴 듯 하지만 이것들은 사실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설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설정을 절대시하고 전부시 하면서 여러 가지 혼란과 고통이 일어난다. 왜? 본래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는 이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존이 필요 없다.
내 존재성은 내가 의존하는 대상과 상관없이 고유하고 당당하고 온전하다. 의존하는 대상이 무엇이든 혹은 있든 없든 상관없다. 나와 내 존재성의 가치와 의미는 내가 사용하는 의존 대상의 가치와 의미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필요에 의해, 또 유용하기에 우리는 상황에 따라 의존할 적절한 대상을 찾고 의존한다. 도구와 수단의 의미로서 말이다. 실제 일상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에 '기꺼이' 의존하고 있다. 나의 정체성이나 존재감만이 아니라 말이다. 그것은 물리적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추상적 수단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에 의존한다고 해서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성까지 그것에 좌우되게 하진 않는다.
'부정적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자신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자기 미움의 심리나 정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혹은 자기혐오, 자기 비하, 자책감, 죄책감 등을 심하게 앓는다면 이제는 선명하게 알아채야 한다. 이것이 어떤 객관적인 자기반성이나 자기 판단이 아니라 '부정적인 나'에 자기 존재성과 정체성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 의식적 행위의 불필요함, 부질없음을 스스로 눈치채고 알아채야 한다.
이제 우리, 굳이 자신의 존재성과 정체성을 부정적 나에 의존할 필요가 없음을 자각하자. 그게 본래는 우리가 가진 자가생존본능, 자가유지본능, 자가보호본능임을 알자. 다만 자신이 그것을 잘못 사용하고 있음을 알자. 부정적 나에 내 존재성을 의존하는 것은 실익이 전혀 없는 과정이다. 그냥 그게 익숙하고, 나도 모르게 과거에 받은 부모나 친구들에게서의 영향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루어진 학습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음을 선명히 알자.
그래서 이왕이면 나의 존재성과 정체성을 이왕이면 '긍정적 나'에 의존하도록 바꾸자. 단번에 쉽게 되진 않을 수 있지만 어려운 것도 아니다. 사실 부정적 나에 의존하는 것도 결국은 내가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니 한 번 한 것을 그대로 해서 그 '대상'만 바꾸면 되는 것이다. 필요한 노력과 훈련, 방법을 찾고 제대로 닦으면 바뀐다.
그리고 항상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자. 나의 존재성과 정체성은 긍정의 나이든 부정의 나이든 어느 것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음을 자각하자. 의존을 도구로 이용하되 이왕이면 부정적 나보다는 긍정적 나에 의존하지만, 그러는 중에 긍정적 나에 대한 의존도 결코 절대적이지도 전부이지도 않음을 항상 눈치채자. 나의 존재성과 정체성은 그 어떤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의존과 상관없이 고유하고 당당하고 온전함을 항상 알아채자.
부정적 나에 대한 의존의 본래 정체는 '드라이한 자기 부족 측정'이다
마지막으로 이 부분을 함께 확인하자. 사실 이 글에서 함께 보고 있는 주제인 '부정적 나에 대한 의존'의 본래 정체는 '드라이한 자기 부족 측정'이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고통을 받을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측정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충족하고 보충하고 완성시켜 나가면 된다. 그것에 이용하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에만 이용하면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측정'한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측정한다. 그래서 어떤 부분의 수치가 어떻게 되는지 계속 본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는 신체에 대한 측정도 될 것이고 점점 복잡하게는 자신의 능력, 정서, 생각, 관계, 사회적 활동 등도 될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봐서 어떤 부분이 충분하고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그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그것이 신체적 외형이든 정신적 영역이든 어떤 기술이나 기예의 영역이든, 사회적 영역이든 더 잘하고 낫게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면 된다. 그렇게 적절하게 쓰면 된다. 불필요하게 자기 미움이나 자기 비하 등에 이 측정과 측정치를 쓰지 말자. 자신의 존재성과 정체성을 그것에 의존하지 말자.
우리는 이제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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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심지어 '부정적인 나'에도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