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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Dec 22. 2015

39. 자기 미움의 숨은 심리(3): 자책감, 죄책감

더 이상 '이미 지나간 것'을 바꾸려 하지 않기

자기 미움의 세 번째 숨은 심리는 '자책감, 죄책감'이다. 첫 번째로 말했던 숨은 심리는 '자기 사랑의 왜곡'이었고 두 번째는 '부정적 생각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기'였다. '자기 미움' 매거진의 모두글과 두 글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 우리는 왜 자기 자신을 미워 하나?
- 지금, 왜 자기 미움인가?


# 자기 미움의 숨은 심리(1): 왜곡된 자기 사랑

- 자기 사랑은 어떻게 자기 미움이 되었나


# 자기 미움의 숨은 심리(2): 부정적 생각을 자기로 여김

- '내가 하는 생각'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함정


자책감과 죄책감은 숨은 심리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드러난 심리라 할 수 있다. 즉 앞서 말한 두 가지 심리는 자신도 잘 모르게 어느 정도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기제라면 자책감과 죄책감은 스스로도 그리고 타인들도 뚜렷한 자기 미움의 마음임을 알면서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난 이 심리에도 숨겨진 기제가 있다. 이 글에서 그것을 같이 밝혀 볼 것이다. 숨겨진 부분을 선명히 자각하면 할수록 자연스럽게 벗어나게 되는 효과가 있다.




이미 존재한 과거와 현실을 당당하고 떳떳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실 자책감, 죄책감은 과도하지 않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의 본래 모습은 객관적인  자기 반성, 자기 성찰이며 올바르게 사용된다면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잘못, 실수, 무능, 실패, 못남 등에 대한 과도한 의식은 건강한 자기반성, 자기 성찰이 아니라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자책, 자학, 죄책감이 된다.


지나간 과거의 일에 대해 필요한 피드백과 반성, 성찰이 아닌 모든 '자기 탓'은 사실 불필요한 것이다. 나에게도 그리고 남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를 더 힘들게 하고 때로는 상대방도 힘들게 한다. 그리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올바른 대처와 해결책을 만들어야 할 때 힘이 빠져 아무것도 못하고 주저 않게 만든다.


우리가 이렇게 불필요하고 비실용적인 자책의 심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게 매몰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종의 숨겨진 심리 기제이고 다소 무의식적이다.


보통은 자신이 일으킨 혹은 자신과 연관된 부정적 상황들에 대해서 누구라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기 잘못, 자기 책임, 자기 무능' 등을 추가로 떠올리게 된다. '내가 잘못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내가 무능력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식의 느낌과 생각이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지만 그러한 자책은 아무런 긍정적 효과가 없다.  


사실 '완전한 나의 잘못' 같은 건 없다. 물론 어느 정도 나의 실력, 준비 부족, 무능, 성향 등이 영향은 주겠지만  그런 상황과 환경에서는 그 누구라도 거의 나와 같이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핑계가 아니다. 어느 정도의 공통된 현실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실패나 실수의 당사자가 ''이기에 우리는 자기 책임 의식을 당연히 느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과도하게 더 나아가 이제 스스로가 스스로를 자책하는 단계로 가는 것이다. 심지어 남들이 괜찮다고 해도 말이다. 왜 그럴까?


그 원인은 우리가 스스로 과거와 과거의 나를 그대로 인정할 수 없어서 '다른 꿈'을 꾸어서 그렇다. 이미 일어난 현실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며 '다른 나, 다른 결과, 다른 상황'을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다른 꿈'은 나의 바람일 뿐 그것으로 실제 과거 그리고 현실을 바꾸진 못한다.


이 다른 꿈, 다른 바람은 얼핏 보기엔 나를 위해서 꾸는 것 같지만 실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내가 판단하기엔 좋은 것 같고 이익을 주는 것 같아서 선택하지만 결국엔 나에게 해롭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경우들 말이다. 자책감, 죄책감이 바로 그렇다. 몰라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알면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


이 경우에 유일한 그리고 가장 지혜로운 대응과 답은 '전적인 수용'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여기서 말하는 '수용'은 포기하거나 절망하거나 무력하게 그냥 받아들인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마음으로 '이미 존재한 과거와 현실을 당당하고 떳떳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존재를 허락하는 것이다. 내가 삶과 존재의 주체가 되어서 말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기꺼이 경험해 주기' 혹은 '기꺼이 겪어주기'라 말할 수도 있다. 대책 없이 당하거나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좋아서, 잘해서, 타당해서 그 존재성을 허락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이미 존재했었으니까 그냥 허락해 주는 것이다. 사실인즉슨, 내가 허락하든 안 하든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상황을 기대하기 때문에 즉 꿈꾸기 때문에 이미 지난 그 과거들에 대해서 그 존재를 허락하지 못하고 계속 부정하려 한다. 불가능인데 가능하다고 믿으며 반복하는 것이다. 그 부정되는 과거에는 나도, 타인도, 상황도 모두 포함되지만 주된 것은 '나'가 된다.


그래서, 그 '과거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허락하지 못하니 자기 부정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자책감, 죄책감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 괴롭고 힘들어 진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과거의 나, 부족한 나, 나 아니고 싶은 나'를 없애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 전략은, 그 노력과 애씀은 가상하 충분히 이해되지만 유감스럽게도 통하지 않는 전략이다. 효과가 없다는 말이다. 애쓰는 사람만 힘들게 될 뿐 아무 실용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소용없는 전략을 자꾸만 반복하게 되는 걸까. 그에 대해서 아래에서 좀 더 상세히 함께 살펴보자. 물론 그냥  살펴보기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밀히 보고 통찰을 하면서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해결 방안들을 찾고 또 실행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효과 없는 전략인 자책감, 죄책감의 또 다른 숨은 심리적 기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자책감, 죄책감은 사실 상당히 이기적인 것이다.
2. 자책감, 죄책감의 건강한 원형은 자기 보호 본능이다.
: 자기 성찰,  자기반성을 통한 재발의 방지.
3. 자책감, 죄책감이 문제가 아니라 그 방향성이 문제이다.
: 과거가 아닌 미래로 향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조금 더 풀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책감, 죄책감은 사실 상당히 이기적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겸손도 자기반성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무의식적인 심리적 우월감 혹은 안정감과 만족감을 위한 전략이다. 하지만 잘못된 전략이고 그 희생자는 결국 자기 자신이 된다.


무슨 말인가 할 것이다. 자책감이 이기적이라고? 그리고 우월감과 연관이 있다고? 반대가 아닌가? 타인이나 상황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자각하고 또 그 책임을 통감하는 심리인데 왜 이게 이기적이지?


물론 제대로 된 자기반성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책감, 죄책감은 교묘한 이기적인 심리가 더해져서 만들어진다. 어떤 점이 이기적 요소인가?


앞서 말했듯이, 바로 자신에 대한 '다른 모습'을 꿈꾸는 것이다. 엄연히 말하면 일종의 자기 배신이자  자기 기만이다. 하지만 목적을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행하게 된다. 일단 기준을 높게 잡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스스로 자기만족을 구한다. '나는 이 정도 되는 사람이야. 이런 존재야. 비록 실제로는 아니더라도.'하고 말이다.


혹은 심리적으로 버티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현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가상의 모습을 만들어 그것을 나의 진짜 모습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두 모습 모두 오류인데, 즉 본인이 생각하는 '못난 자신의 현재 모습'도 사실은 진짜 자신의 모습이 아니며 또한 본인이 바라는 '뛰어난 자신의 모습'도 실제 자신의 모습이 아니다.


이렇게 자신이 느끼는 '현재의 모습'이 어떤 일이나 상황에서 스스로 정한 그 기준에 미달될 때 과도한 자책과 죄책감 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비효율적이고 스스로에게 손해이다. 즉 일종의 '실패한 이기심, 비효율적인 이기심'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의문이 들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모습을  꿈꾸는 것을 하지 말란 말인가? 우리 인간은 누구나 과거와 현재까지의 모습보다 더 발달하고 진보된 자신을 추구하게 마련인 것 아닌가? 그래야 자기 발전도 있고 말이다. 만약 제대로 하게 된다면 그게 맞다. 그리고 이 글도 그것을 제대로 같이 해 보자는 취지의 글이다. 문제는 불필요한 자책감, 죄책감의 원인이 되는 '그려진 다른 모습과 다른 상황'이 그런 건강하고 합리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모습'은 하나의 환상을 말한다. 현실 혹은 실제와는 관계없는 어떤 '높은 기준과 높은 위치의 자신의 상'을 말하는 것이다. 좋아 보이고 멋져 보이지만 환상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적 고집이고 집착이다. 그리고 그 동기는 앞서 말했듯이 이기적(실패한)이다. 자책, 죄책을 한다고 해서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겸손하거나 이타적이거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닌 것이다.


일종의 비실용적인 우월감 혹은 심리적인 방어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기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비록 실패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면에서 그러한 꿈과 상 즉 실패하지 않고, 못나지 않고, 무능력하지 않고, 멋지고, 능력 있고, 잘 하고 있는 나와 상황을 그림으로써 스스로 심리적 우월감, 만족감, 안심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그러면서 실제의 나 그리고 실제 상황과의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나아가 오히려 실제 나와 현실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게 되고 가장 실용적인 대응과 해결책을 떠올리지 못하고 실행하지 못하게 된다.


주의할 것은, 뭔가 잘못하고 못난 나의 모습 대신 잘 하고 멋진 나의 모습과 상황을 그리고 바라는 것이 결코 나쁘다는 말이 아닌 부분이다. 또 다른 꿈, 좀 더 멋진 나와 나의 삶 그리고 자기 성장과 발전을 포기하란 말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계속 더 나은 나를 꿈꾸고 또 성취할 수 있다. 또 원하면 하는 것이다.


단지 '환상'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환상은 어떤 경우든 실제 도움은 안 되며 여러 가지 부작용을 만든다. 그래서 환상은 일찍 버리고 차라리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목표와 전략을 세우는 것이 이득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실용적으로 나에게 이익이 되는 지 바라보자는 말이다. 그래서 만약 이 전략이 실용적이지도 않고 나에게 해가 된다면 그러면 전략을 수정하자는 말이다. 다른 누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문제는 그 환상의 상은 자기 스스로 만든 게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건강하고 합리적인 것에 바탕한 상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의 주입에 의해 수동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상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스스로 원하는 자기상'이라 착각하고 그렇게 믿어 버린다. 그래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자든 여자든 타인과 사회가 좋다고 하는 멋진 몸매, 예쁜 얼굴, 큰 키 등을 가지는 것을 소망하는 경우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멘탈갑' 등으로 표현되는 멋진 의식과 정신을 가지는 것도 포함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보이는 파트너를 만나는 것, 누구나  부러워하는 뛰어난 능려과 멋진 직업을 가지는 것, 지식과 명예와 유명세를 가지는 것도 해당된다. 혹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나 조직에서 뭔가 일을 잘 하고 능력을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성취하고 싶으면 최선의 노력을 해서 성취를 하면 된다. 핵심은 그것이 '진짜 내가 선택하는 목표'인가 혹은 '주입되어서 맹목적으로 바라게 되는 것'인가이다. 전자는 그 성취도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그리고 그 과정도 그 결과도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 후자는 과정과 결과 모두 나를 힘들게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주입되어 스스로 자기 것이라 착각하는 목표가 아닌 진짜 내가 스스로 세우는 목표가 필요하다. 그래서 환상을 고수하면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자책감,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2. 자책감, 죄책감의 건강한 원형은 자기 보호 본능이다.
: 자기 성찰,  자기 반성을 통한 재발의 방지


자책감, 죄책감의 본래 목표는 미래에 같은 실수나 실패를 거듭하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 본래의 목적이 어떻게 왜곡되는 지 볼 수 있어야 한다.


고고학계에 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어느 지역에 고대로부터 수 많은 동물들이 빠져서 죽은 거대한 늪지대가 있었다고 한다. 현대로 오면서 그 늪지대는 물기가 모두 빠져서 굳은 땅이 되었는데 고고학자들이 그 땅을 발굴하자 오랫동안 그곳에 묻힌 과거 동물들의 화석이 숱하게 나왔다 한다. 그런데 유일하게 나오지 않은 동물이 있었다. 바로 인간이었다.


아마도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 그곳에 빠져서 죽는 모습을 보고 그곳이 위험한 곳이라 알아챘을 것이다. 혹은 그곳에 빠졌던 이가 있었는데 구조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러 경우를 거쳐 인간은 그 장소가 문제가 있다고 파악하고 그 후에는 그곳을 피해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동물들은 그런 인지 능력이 없으므로 빠지고 또 빠지며 왔던 것이다.


스스로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 그 느낌과 파악을 바탕으로 가지는 자책감과 죄책감은 사실 이렇듯 잠재적 위험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일종의 보호 본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음에 같은 실수나 상황을 반복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마치 다른 동물들은 모두 빠지는 늪지대에 빠지지 않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이것이 꼭 물리적인 어떤 장소나 장애만이 아니라 위험한 상황을 피하는데 이용하기도 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의 잘못 등을 피하는데도 이용된다. 그러므로 본래 이것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기 성찰,  자기반성의 기능이고 건강한 피드백 과정이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그 본래의 목적에다가 혹은 그 본래의 목적 대신 불필요한 반응들이 더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책감, 죄책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 '뭔가 잘못되었다'라는 느낌을 느끼고 또 실제 그렇다 하더라도, 그때 우리가 떠올려야 할 것은 '늪지대를 피한 지혜로운 인간'이다. 자책하고 자괴하며 불필요하게 위축되고 움츠려들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가 느끼는 뭔가 '안 좋은 듯한 느낌'은 다른 동물들처럼 다시 그 늪지대를 지나가다 빠지게 되는 것에 대한 '유용한 경계심'일뿐이다. 그냥 객관적이고 도움이 되는 신호일뿐이며 우리는 그 신호를 받아서 다음을 잘 준비하면 된다. 멈출 건 멈추고 바꿀 건 바꾸고 추가할 건 추가해 가면 된다.




3. 자책감, 죄책감이 문제가 아니라 그 방향성이 문제이다.
: 과거가 아닌 미래로 향해야 한다.


과거는, 아무리 '다른 꿈'을 꾸더라도 바뀔 수가 없다. 이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바뀐 과거'를 꿈꾸고 바라는 건 정신적 고집에 불과하다. 어떻게 보면 떼를 쓰는 것이다. 추측컨데 이 고집의 원형은 우리가 아기 때 필요해서 떼를 쓰면 옆에 있던 누군가(물론 부모)가 들어주던 그 체험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영유아기를 지나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더 이상 그 방법은 통하지 않게 된다. 사람에 따라 조금 더 긴 기간 동안 부모에게 혹은 주위 사람들에게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데로 떼쓰면 뭔가 이루어지는' 상황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기가 지나면 그런 상황은 끝난다.(이후에도 계속 가는 경우가 있다. 바로 잘못 형성된 성격과 인격에 의해 직원이나 타인들을 마치 하인이나 노예 대하듯 하면서 최근에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재벌가, 재력가 등의 일부 2, 3, 4세들이다.)


그 후부터는 이제 우리는 상황과 현실에 맞추어 가장 지혜롭고 적절한 방안과 태도, 행동과 생각들을 하기 시작한다. 개인마다 그 정도와 효율에서 차이가 있을 순 있지만 모두가 최선을 다해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데 아마도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과거 영유아기 때의 그 의식적 패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미 지나간 '과거의 잘못된 상황, 과거의 잘못된 나'를 허락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허용하지 못하고 그것의 존재를 거부하곤 하기 때문이다. 대상은 없지만 누군가에게 떼를 쓰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무의식의 의식화'이다. 위에서 말한 여러 원인에 의해 우리에게는 '이미 존재한 과거'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무의식적 심리가 일어난다. 더 이상 효용성도 없고 실용성도 없는 이 기제를  되풀이하고, 고집하고, 버리지 못한다. 단지 심리적인 만족, 위안, 안심을 위해서 말이다.


이제는 이러한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의식화해야 한다. 눈치채야 하고 알아채야 한다. 선명히  의식화하면  할수록 마치 어둠이 빛에 의해 저절로 없어지듯이 우리의 무의식적 패턴과 습관도 점점 사라질 것이다. 물론 의식적인 노력이 더해지면 더 좋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될수록 우리의 의식은 힘을 얻게 되고, 이제 불필요하게 힘을 낭비하는 과거로의 추구 혹은 나에 대한 부정도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남게 되는 의식의 힘으로 나와 주변을 더욱 건강 만들고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완성시켜 나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기꺼이 해 볼만한 일이다.

 



<관련 글 링크>


# 우리는 왜 자기 자신을 미워 하나? 

- 지금, 왜 자기 미움인가?


# 자기 미움의 숨은 심리(1): 왜곡된 자기 사랑 

- 자기 사랑은 어떻게 자기 미움이 되었나


# 자기 미움의 숨은 심리(2): 부정적 생각을 자기로 여김 

- '내가 하는 생각'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함정


# 자기 미움의 숨은 심리(3): 자책감,  죄책감

더 이상 '이미 지나간 것'을 바꾸려 하지  않기


# 자기 미움의 숨은 심리(4): '부정적 나'에 의존하기

- 우리는 심지어 '부정적인 나'에도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 자기 미움의 숨은  심리(5): 미리 자학하기와 '체제 정당화'

- '현실과 상황 정당화'로 자기 심리  마취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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